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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의 퍼스펙티브

밀실 공천으로는 고장 난 대의제 정상화 못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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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의제 어떻게 수리하나 

비교적 간단한 그림이지만 그림1은 여의도 정치인들과 시민 사이의 민주주의에 관한 ‘참을 수 없는 괴리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요즘 여의도 정치인들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독일식 비례제를 강화하느냐 혹은 그에 반대하느냐의 논쟁에 열중하고 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림1의 수평축, 즉 제도권 권력 배분을 조금 더 집중하는 형태로 만드느냐 혹은 더 분산하는 형태로 만드느냐는 논쟁에 몰두해 있다. 하지만 정작 대다수 시민은 이러한 권력 분산-권력 집중(비례제 이름이 내걸려 있든 혹은 이원정부제 간판이 걸려 있든) 논의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관심은 고장 난 대의제를 어떻게 감시·비판·수리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 시민들의 직접 민주주의를 얼마나 확장할 것인가의 문제(즉 그림1의 수직축)에 쏠리고 있다.

정당 개방과 민주적 운영 없이 #비례제 확대 통한 권력 분산은 #보기 좋은 모래성에 불과 #대통령 퇴진 요구한 촛불집회나 #공론화 통한 원전 공사 재개는 #직접민주주의 통한 대의제 보완 #대의제에 멍든 민주주의 세우려면 #시민 관여·헌신·절제·관용 있어야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언제나 그렇듯 요즘 여의도 정치인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개헌 논의와 선거제도 개편 논의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당파적 유불리에 있다. 자유한국당이 비례제 선거제도 개편에 소극적인 까닭이나 국민의당이 비례제에 적극적인 이유는 따지고 보면 같은 당파적 논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비례제 선거제도 개편론은 권력의 분산이라는 좀 더 고급스러운 명분으로 포장되고 있다. 대통령제의 폐해는 대통령 일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고, 또 서유럽의 선진 민주복지 국가들이 대부분 비례제 선거제도와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권력 분산을 촉진하는 비례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도 극복하고 복지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가 동원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대 논리 역시 표면적으로 고결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과도한 권력 분산은 여야 정당 간 교착을 가져올 뿐이고, 대통령제 정부 형태에서 정당 체제의 다당제화는 남미식 대통령제의 마비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 역시 표면적 합리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권력 분산을 강조하는 비례제를 강화하건 혹은 권력 집중을 강조하는 소선거구제를 강화하건 간에 현재의 정당 정치와 국회의 운영 방식으로는 고장 난 대의제를 정상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지금처럼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 공천 과정이 불투명하게 밀실에서 정당 내 실력자들에 의해 좌우되는 한 비례의원을 100명으로 늘리든 혹은 150명으로 늘리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정당의 개방성과 민주적 운영이 확고하게 전제되지 않는 한 비례제를 통한 권력 분산이란 그저 보기 좋은 모래성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경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제부터 우리는 그림1에서 보이는 두 가지 변화에 주목해 보자. 첫째, 필자는 우리 정치 체제가 1987년 민주화 이후 꾸준하게 권력 집중 체제로부터 중간지대로 이동해 왔다고 본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같은 권력 분산형 민주주의 국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권력 집중이 강한 미국이나 영국형 민주주의보다는 권력 분산이 이뤄진 혼합형 체제로 진화해 왔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2표 병립제(즉 소선거구제 투표와 비례대표를 각각 따로 투표)로 변화한 것은 혼합형으로의 전환의 핵심적 고리다. 물론 비례대표 의석 비율은 2표 병립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이나 뉴질랜드와 비교해 현저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2표 병립제를 통해 3~4개 정당이 각축하는 다당제가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들 다당제 정당 사이의 게임 방식이 중대하게 변화하는 계기가 2012년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이다. 사실상 중요한 법안들의 처리에는 단순 과반수 의석이 아니라 60%의 의석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양대 정당이 아닌 소규모 정당들의 거부권 권력은 현저하게 증가한 셈이고, 이는 곧 국회 내 정당 간의 권력 집중이 과거보다 크게 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의제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 대두

그림1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수직축 상의 이동이다. 고장 난 대의제와 그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시민의 직접 행동과 참여는 우리 민주주의에서 그동안 꾸준히 확대돼 왔다. 물론 이러한 시민의 직접 참여의 정점에는 지난해와 올해 초에 진행된 촛불집회가 자리 잡고 있다.

전임 대통령의 거대한 부패 스캔들과 국정 난맥이 드러났을 때 이를 탄핵이라는 헌법 절차로 해결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광장에 모인 시민이었다. 스마트폰과 다양한 뉴미디어를 통해 동료 시민과 연결된 시민들은 민주주의 광장에 모여 대통령의 탄핵을 직접 요구했다. 제도권 정당들이 우왕좌왕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시민은 대통령 퇴진과 탄핵이라는 요구를 명료하고도 일관되게 직접 요구했다.

주말마다 수십만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던 촛불집회는 대의제 실패에 맞서는 시민의 직접 행동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상징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우리 민주주의의 구석구석을 차분하게 돌아보면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확대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크게 보자면 (1)대의기관을 우회해 직접 정부의 정책을 움직이거나 결정하는 데 참여하려는 노력, (2)정당을 포함한 대의제 기구들이 시민의 의사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제어하기 위한 노력으로 구분된다.

먼저 첫 번째 범주를 살펴보자면 시민참여 예산제·시민청원·정보공개청구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Porto Alegre)시의 실험적 모델에서부터 시작된 시민참여예산제는 우리의 경우에는 2011년부터 의무화됐다. 지방재정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들은 예산의 일부를 시민의 직접 제안과 지자체의 심의를 거쳐 예산안에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시민참여예산제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서울시에서는 시민이 직접 인터넷 등으로 제안한 사업들 가운데 220여 개 사업에 대해 500억원(2013년 기준)의 예산이 시민참여예산제를 통해 집행된 바 있다. 또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활발해지고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제도 역시 직접민주주의의 한 흐름이다. 20만 명 이상의 국민청원이 모일 경우 청와대는 이에 대한 입장 표명을 내놓고 있는데 낙태죄 폐지 여부, 주취자 감형 등을 포함한 세 안건은 이러한 기준을 통과해 청와대의 답변과 그에 따른 후속 토론 등이 이어져 왔다.

최근 직접민주주의 흐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신고리 공론화위원회였다. 선거 공약으로 신고리 원전 공사 중단을 약속한 바 있던 문재인 대통령은 찬반 분열이 극심한 이 결정을 위해 시민의 숙의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미니 공중(mini-public)이라 불릴 만한 시민참여단은 수개월간 원자력 발전의 긍정·부정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 청취, 참여단 내부의 토론과 조사 등을 거쳐 마침내 신고리 원전 공사를 재개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내놓았고 문재인 정부는 이를 수용한 바 있다. 공론화위원회는 장기적으로는 원전 의존을 줄여 가는 탈원전을 지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두 번째 범주에 꼽힐 만한 사례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당 공직 후보 선출 과정의 개방형 경선제도를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당의 공직 후보 선출(대통령 후보이든 국회의원 후보이든)은 정당 당원의 행사라고 할 수 있지만 1970년대 미국의 주요 정당들이 이른바 개방형 경선제를 통해 일반 유권자에게 문호를 대폭 개방하는 개혁이 이뤄진 이래 개방형 경선제는 시민이 대의기구인 정당에 직접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로 자리 잡게 됐다.

우리의 경우에도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제한된 형태의 경선제를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제도를 도입한 이후 때때로 진전과 후퇴가 있기는 했지만, 경선제를 통한 시민의 정당 참여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굳어져 왔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선순환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시발점을 이루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 루소가 “시민은 투표하는 날만 자유로울 뿐이다”고 언명한 바와 같이,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긴장과 갈등은 민주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민주주의의 본질적 속성이다. 우리가 대의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면, 문제는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가 갈등과 상호 파괴보다는 상호 견제와 선순환 고리를 찾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의 경제적 결과나 사회적 평등을 낳는다고 말할 수 없듯이 직접민주주의가 항상 민주주의의 올바르고 유일한 횃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관여, 헌신과 절제, 관용이 균형을 이룰 때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로 멍든 민주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의 양 날개로 균형을 잡는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