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적발 기관 공개해야 채용비리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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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박진석 경제부 기자

박진석 경제부 기자

8일 발표된 공공기관 채용 비리 실태는 보는 이의 혀를 차게 만들었다. 한 달 보름여 만에 2234건의 문제 사항을 적발해냈다는 건 채용 비리가 그만큼 만연해 있었다는 얘기다.

대책본부 발표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컸다. 먼저 문제의 공공기관들이 모두 익명의 그늘에 숨었다. 대책본부는 적발된 기관을 단 한 곳도 밝히지 않았고, 숫자도 공개하지 않았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이유로 내세웠다. 심각한 청년실업 사태 속에서 취업, 특히 공기업을 비롯한 공공기관 취업은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채용 비리 혐의를 입증해놓고도 일괄 익명 처리를 하는 건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거나 공공기관 보호 의도가 깔린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다.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대책본부는 앞선 감사원 감사나 국정감사 과정에서 채용 비리 혐의가 드러난 강원랜드·금융감독원·우리은행·국기원의 이름을 배포 자료에 공개했다. 더구나 대책본부 논리대로라면 채용 비리는 있었지만, 기소까지 이어지지 않는 기관은 끝까지 실명 공개를 하면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채용 비리의 가장 큰 수혜자, 즉 채용된 당사자를 당장 물러나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공식적인 이유는 “기관별 규정이 달라서 협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한 기재부 관계자는 “당사자가 채용 비리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입증돼야 퇴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나는 몰랐다”라고 끝까지 버티면 마땅히 내보낼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억울하게 탈락한 응시자들을 구제할 수도 없다. 이쯤 되면 “채용 비리 특별조사를 왜 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일단 검찰은 조사를 철저히 하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기소 대상자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최소한 이들과 해당 기관의 실명이 알려진다. 유죄 판결을 받을 피의자의 숫자도 늘 수 있다. 그래야 채용 비리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이는 억울한 탈락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구제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행정부는 이와 별도로 채용 비리가 한 건이라도 적발된 기관은 조사 종료 때 실명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옛 정권 기관장 몰아내기용 조사 아니냐”는 의구심도 지울 수 있다.

박진석 경제부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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