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 노리오 소니 명예회장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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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소니에 입사, 회장까지 오른 뒤 지난 1월 29일 자신의 73번째 생일에 퇴임한 오가 노리오(大賀典雄)명예회장이 한국을 찾았다.

본지 곽재원 경제담당 부국장이 3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오가 회장을 만났다. 그는 차분한 자세로 말을 하다가도 예술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목소리 톤이 올라가기도 했다. 기업인으로서뿐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성공한 오가 회장은 "내가 이룬 것은 운이 아니라 노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어떤 이유로 방한했나. 한국에 자주 오는 편인가.

"셀수 없이 많이 왔다. 하루짜리 방문을 한 적도 있다. 마산 현지 공장을 들르기 위해 도쿄에서 부산으로 갔다가 바로 되돌아간 적도 있다. 이번 방문은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31일 서울 예술의 전당, 특별예술고문 정명훈 지휘) 일정에 맞춰서 도쿄필하모닉 회장 자격으로 왔다. 어제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상무를 만났다. 삼성 전체가 훌륭한 회사로 성장했고 제품 또한 훌륭하다. 그런 점에서 삼성을 존경한다."

-정명훈씨가 도쿄필의 지휘자가 되는데 오가 명예회장의 지원이 컸다고 하는데.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 그런 철학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유럽.미국.아시아 사람 가릴 것 없이 우수한 음악성을 지닌 사람이면 오케스트라에서 초빙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씨가 지휘하는 것을 보고 음악성에 감탄, 처음에는 시범적으로 1년간 지휘를 맡기고 그후 맘에 들면 연장하기로 했는데 정씨가 연장에 동의했다. 이번 공연도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한국인이고 오케스트라만 일본인이다. '국적 없는' 음악회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정씨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다."

-소니는 세계를 향한 일본의 소리라고 한다. 그 소리를 만든 사람이 오가 회장이라고들 한다. 예술과 과학기술의 결합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1953년 4월 소니에 들어왔지만 입사 1년 전부터 소니 창업자로부터 계속 제의가 들어왔었다. 당시 나는 음악가였기 때문에 경영인이 돼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지만 독일에 유학가기 전에 특별한 목표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니에 입사, 매니지먼트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그때 입사 조건이 경영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가지 역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2년간만 병행했을 뿐이다. 일을 하면서 60세가 되면 음악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지만 60세가 돼서도 소니 측이 계속 맡아 달라고 해서 70세가 넘을 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초기에 어떤 일을 했고 요즘 하는 일은 무엇인가.

"디자인.광고.판매전략 등을 담당했다. 34세에 임원이 된 뒤 39년간 임원으로 일했다. 그러다보니 인생의 70%를 소니에 몸담은 셈이 됐다. 요즘에는 인생을 여유롭게 하기 위해 업무에서 빠지려고 하지만 소니에서 계속 업무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업무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오가 회장은 50여년 전 창업자에 의해 발탁됐다. 최고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는 인재는 어떻게 육성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소니의 창립자들은 천재적인 분들이다. 내가 소니의 이익 창출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창립자들은 내가 이 정도로 이익 창출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니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 82년 사장 취임 당시엔 매출이 1조엔이었지만 사장에서 물러날 때(95년)는 4조엔을 달성했다.

요즘 소니의 매출은 8조엔 정도다. 매출보다는 어떻게 이익을 창출하느냐가 기업에 더욱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이익을 낼 수 있는 제품을 출시하느냐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이익을 낼 수 없는 제품은 누구나 출시할 수 있지만 남이 할 수 없는 제품을 찾아내긴 힘들다. '좋은 코'(감각)를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그런 제품을 발견할 수 있다."

-소니는 트랜지스터부터 시작해 CD.MD.PC 바이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첨단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원동력은 어디에 있나.

"답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얘기하기 쉽지 않다. 나는 음악도로 소니 경영에 참여했지만 모든 음악도가 경영인으로서 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쿄예술대 재학시절 나는 그 학교 재학생이 이익 창출에 가장 멀리 있는 집단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익 창출을 한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이고, 흥미있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이다."

-일본.한국 다 경기가 나쁘다. 취업을 못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조언해 준다면….

"한번 흥미를 가지면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 제품 기획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은 상당수가 '지금 이런 제품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3~5년 뒤 이런 제품이 있으면 생활이 편해지고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니가 CD를 개발할 때 LP판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LP판은 초기에는 음질이 좋지만 오디오의 바늘이 판의 중심으로 갈수록 음질이 떨어진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CD를 만든 것이다. 당시 주요 레코드 회사들이 CD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소니와 필립스는 신념을 가지고 밀고 나갔다. 재미있게도 내가 예상한 대로 시장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다. 운을 불러들이기 위한 방법을 열심히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은 운이 아니라 노력 때문이다."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받게 된 퇴직위로금 16억엔을 나가노(長野)현의 휴양지인 가루이자와(輕井澤)에 내놓기로 했는데.

"나는 자식이 없어 부인과 상의하면 됐다. 그 지역에 음악회를 열 만한 장소가 없어서 기부했다."

-요즘을 인생 다모작시대라고 한다. 어떤 설계도를 갖고 있나.

"오늘 질문받으면서 스스로 답변하지 못하는 상황을 발견했다. 앞으로 이를 정리해 남기겠다."

-손수 제트기를 운전하기도 한다는데….

"사람이 비행기를 타면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72세까지 최고경영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자는 시간에도 조종실에서 운전하는 것처럼 살아 왔기 때문이다.

비행기 관련 자격증을 7개 갖고 있으며 배 관련 1급 자격증도 갖고 있다. 나는 한번 시작하면 최고에 달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2001년 베이징 사건(당시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비행기)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정리=김창규 기자

*** 오가 노리오 회장은…

1930년 일본 시즈오카(靜岡)현에서 태어난 오가 노리오 명예회장은 53년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성악)를 졸업하고 57년 베를린 국립예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후 그는 프로 가수로 활약하다 일본으로 돌아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출연하는 등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소니의 음향기기 품질 테스트를 해준 것이 인연이 돼 소니 창업자인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와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의 권유로 53년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59년 소니에 정식 입사했다. 이후 그는 64년 이사가 된 뒤 소니 사장, 회장,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올 1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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