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착시에서 벗어나면 우리 경제의 민낯이 드러날 것이다.”
바른정당 유승민 대표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우리의 경제 상황을 이렇게 꼬집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의 손길을 내민지 20년이 되는 날을 맞아 올린 이 글에서 그는 "IMF 위기는 20년째 계속되고 있다"고도 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10개 팔면 두개는 반도체 칩 #상장사 이익 1년새 30조 늘었지만 반도체 빼면 3조 #"반도체 호황 취해있다 구제금융 사태, 되풀이 말아야"
정말 한국 경제는 '반도체 착시'에 빠진 걸까. 착시가 있다면 어느 정도 수준일까.
먼저 '경제 성장의 돌파구'로 불리는 수출 실적을 들여다봤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만 해도 9%에 불과했다. 이후 매년 꾸준히 높아지다 올해(1~11월 기준)는 이 비율이 16.8%까지 치솟았다. 'Made in Korea' 제품 1000원어치를 팔면 170원이 반도체를 판 금액이란 얘기다. 수출에서 반도체 의존도가 갈수록 커지고 있으니 반도체 착시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한국무역협회의 문병기 수석연구원은 "올해 반도체는 단일 품목으로 900억 달러 수출 규모를 넘어설 전망"이라며 "1993년 대한민국 전체 수출 보다도 많은 규모"라고 설명했다.
수출 증가율에서도 반도체 효과는 절대적이다. 우리나라 수출 총액은 2015년 3631억 달러까지 떨어졌다가 지난해 4302억 달러로 회복한 뒤 올해는 11월까지 5248억 달러를 이를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수출 증가에 대한 품목별 기여도를 살펴보면 반도체가 42.9%로 압도적이다. 예년보다 비교적 증가폭이 컸다는 석유화학(10.4%), 선박(10.4%), 석유제품(10.1%)에 국제적으로 제품 경쟁력을 인정 받는 철강(7.4%)과 자동차(4.2%)를 모두 합쳐도 반도체 한 종목의 수출 기여도에 미치지 못했다.
'반도체 원톱' 현상은 경제 지표나 기업 실적에도 착시를 유발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분기 국내총생산(GDP) 통계에서 반도체가 포함된 정보통신(IT) IT산업의 경제성장률 기여도는 0.5%포인트였다. 3분기 경제성장률 1.5% 중 0.5%포인트가 IT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도체 성장=경제 전체 성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수익=경제 전체 수익'처럼 보이는 문제도 있다. 한국거래소가 최근 코스피 525개 상장사의 1~3분기 누적 실적을 분석한 결과 우리 기업들의 올해 영업이익은 120조5000억원(연결기준)에 달했다. 지난해보다 26조1000억원이나 늘었다. 그런데 여기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을 제외하면 523개사의 영업이익은 지난해보다 1000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런 현상은 증시에서 '반도체 주가 상승=주식시장 전체 호황'처럼 보이는 착시를 유발한다. 4일 코스피는 2501.67로 마감했다. 하지만 ‘반도체 효과’를 뺀 수치는 초라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한 코스피 지수는 4일 기준 1880.86에 불과하다. 2500은커녕 2000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반도체 착시에서 벗어나 한국 경제의 '진짜 체력'을 직시할 것을 주문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경제는 1993~95년에 전대미문의 반도체 호황이 끝난 뒤 97년 구제금융 위기, 2002~04년에 D램 급성장기가 끝난 08년 경제위기를 맞았다"며 "반도체 호황기에 다른 산업 분야의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구조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경제 지표를 보면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80%대는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70% 초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반도체 호황에 취해 펀더멘털을 오판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박태희·조현숙 기자 adonis55@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