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나라에도 도덕적 해이가 있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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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최종구 금융위원장

최종구 금융위원장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왕족 맹상군은 풍환을 불러 백성들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오라고 했다. 풍환은 돈은커녕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돈을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고 감당 불능인 사람들 채무는 없애버렸다. 맹상군이 다그치자 풍환은 “가난한 사람들은 10년이 지나도 돈을 갚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전국책 제책의 내용이다.

풍환은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 것인가. 도덕은 무엇인가. 칸트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도덕이 결정된다”고 했고, 마키아벨리는 “도덕은 사회생활을 원활하고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즉, 도덕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합의’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채무자에게 도덕은 빚을 상환하는 것이다. 갚을 능력이 있다면 갚는 것이 대다수 사회의 합의였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도덕적 해이였다. 그러나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사람이 반드시 모든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도 사회적 합의였을까. 절대 불변이라고 보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채무를 갚지 못해 노예로 전락한 사례는 허다했다. 하지만 1978년 미국은 채무자 구제와 재출발을 강조하는 쪽으로 연방 파산법을 개정했다. 아테네 집정관 솔론은 노예로 전락한 농민들의 채무를 없애 신분을 회복해줬다.

반대로 채권자에게 도덕은 돌려받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돈을 빌려주고 상환불능 땐 채무자와 책임을 나눠지는 것이다. 대다수 국가는 변제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 대해서는 회생·파산제도를 통해 채권자도 책임을 분담하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을 보면 “대출이 언제나 상환받을 수 있는 것이면 그 결과는 재앙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또 금융회사의 금리산정은 어떤가. 부실 가능성을 반영해 금리수준을 산정해 놓고는 연체가 발생하면 상환능력과 무관하게 전액 회수하려는 것도 일종의 도덕적 해이다.

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원금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채권 중 상환능력이 없는 채권을 소각하고, 금융회사 등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도 신청을 받아 상환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면 매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없도록 국세청, 국토부, 행안부 등이 보유한 공신력 있는 소득과 재산정보를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상환능력이 있는 채무자는 능력에 맞춰 갚도록 하고,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만 추심중단 및 채권소각 조치를 할 것이다.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도 채무재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에 대한 형평성도 충분히 감안할 계획이다. 본인이 원하면 재심사를 거쳐 상환능력 부족이 확인되면 즉시 채무를 감면해줄 것이다.

부채는 상환돼야 한다는 것은 건강한 금융시스템을 지탱하는 기본원칙이다. 그러나 실업·폐업·질병 등 복합적인 이유로 장기 연체에 빠져 자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상환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다. 건강한 사회·경제 시스템 유지 책무가 있는 국가와 사회에게 또 다른 도덕적 해이일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이 재기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편이 지속가능한 금융시스템을 만드는 길이 아닐까.

최종구 금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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