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도보팅’ 폐지 초읽기 … 재계 반발에도 대책 없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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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명 ‘그림자투표(shadow voting·섀도보팅)’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정부 연구용역 결과가 나왔지만, 정부가 섀도보팅 폐지를 강행하면서 논란이 예상된다.

법무부 연구용역 ‘유예’ 의견 냈지만 #정부, 연말 자동 폐지되게 놔둘 듯 #내년 상장사 23% 감사 선임 걱정 #학계 “상법상 정족수 기준 강화하되 #정관 고치면 기준 바꿀 수 있게 하자”

섀도보팅은 주주총회에 불참한 주주의 의결권을 대리 행사할 수 있게 허용한 제도다. 대다수 주주가 주주총회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주총에 불참한 주주는 참석한 주주의 찬·반 비율대로 투표한 것으로 간주한다. 섀도보팅은 일몰 조항에 따라 오는 다음 달 1일 자동 폐지된다.

법무부가 서울대 산학협력단을 통해 실시한 ‘섀도보팅 실태 분석 및 폐지에 따른 대응방안 연구’ 용역에 따르면, 상장기업이 의결한 안건 10개 중 8개는 섀도보팅 제도가 없었다면 주주총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은 최근 3년간 주총안건 6268개를 조사해 “73.2%(보통결의)~83.4%(특별결의)의 안건이 섀도보팅 덕분에 의결정족수를 채웠다”며 “한시적으로 섀도보팅을 유예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친노동·반기업 정책 기조를 이어가면서 섀도보팅 제도는 그대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일부 상장사가 경영권을 강화하기 위해 허수아비 주총을 열고 주요안건을 입맛대로 처리하는 등 제도를 악용한다고 본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섀도보팅 폐지는 기업의 중·장기적 성장을 위해 언젠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는 정부가 발주한 연구용역 결과가 정반대로 나온 상황에서 섀도보팅 폐지를 밀어붙이는 것이 또 다른 ‘코드 맞추기’라고 비판하고 있다.

김규태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전무는 “코스피 상장사 주주는 평균 주식보유 기간이 7.3개월이다. 코스닥은 3.1개월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소액주주가 단기투자로 시세차익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주총장에 소액주주를 25%나 불러오라고 하는 건 기업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와 재계가 갈등하는 상황에서 학계가 대안을 제시했다. 일정대로 섀도보팅을 폐지하면서 정부 주장대로 법적인 주주총회 결의 요건을 강화하되, 법적 테두리 내에서는 기업의 자율적인 권한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코스닥협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한국경제연구원이 11월 30일 개최한 ‘최근 상법의 주요 쟁점과 해법’ 토론회에서 이런 주장이 처음 나왔다.

현행 제도는 전체 발행주식의 25% 이상이 출석하고, 동시에 주총에 참석한 주주의 50% 이상이 찬성해야 안건이 통과된다(보통결의 기준). 예컨대 어느 기업이 100주를 발행했다면, 25주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가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 또 주총장에 80주가 참석했다면 40주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만약 30주가 참석했다면 그래도 최소한 25주는 동의가 필요하다.

홍복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토론회에서 “발행주식의 50% 이상이 출석하고, 동시에 주총에 참석한 주주의 50% 이상이 찬성해야 안건이 통과하도록 상법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정부 주장대로 의결 요건을 더 까다롭게 한 것이다.

대신 보완책으로 홍 교수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관 수정을 결의하면 의결 기준을 바꿀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을 내놨다. 기업에 따라 주주를 모을 수 있는 상황이 제각각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한마디로 원칙적인 법은 강화하면서, 기업 자율성도 강화하자는 생각이다. 홍복기 교수는 “기업의 기본법인 상법의 위상도 강화하면서, 기업 실무적 관점에서 자율권 확보라는 상법의 가치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삼성물산이 2015년 7월 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결의할 때 특별결의 요건에 부합하는 지분을 확보하려고 수많은 임직원이 뛰어들었던 것처럼, 법적 요건을 강화하면 오히려 기업하기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홍복기 교수는 “정관 변경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한 번쯤은 주주의 동의를 얻는 절차가 필요하다”며 “이 역시 경영자의 임무 중 하나”라고 맞섰다.

당장 내년에 감사를 선임해야 하는 회사는 전체 상장사의 23.3%(436개)다. 감사를 선임하지 못하면 과태료를 내야하고, 선임될 때까지 계속해서 임시주총을 열어야 한다. 최악의 경우 한국거래소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고, 상장폐지 대상이 된다. 때문에 재계는 섀도보팅을 유예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주무부서인 금융위는 요지부동이다. 다만 정족수 미달로 감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관리종목으로 지정되지 않도록 하는 등의 보완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손해용·문희철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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