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 벗는데 8년, 단속경찰 할리우드 액션에 지옥 겪은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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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음주단속 경찰관 할리우드 액션에 망가진 부부 사연 들어보니

귀농인 박철씨 2009년 6월 음주단속 과정서 경찰관 폭행 혐의로 벌금형 #법원 재심 끝에 8년 만에 무죄 선고…박씨 "재판과정서 과학적 검증 아쉬워" #박씨 일용직 근로 전전, 아내 최씨 교직에서 면직 처리돼 화장품 공장다니기도 #박씨 "부당한 공권력에 피해받는 국민들 없도록 해야"…아내 위증 재판 재심남아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박철씨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9일 오후 박씨가 그동안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박철씨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9일 오후 박씨가 그동안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저는 투쟁가도 돈키호테도 아닙니다. 그저 숲해설가를 꿈꾸는 평범한 귀농인이지요.”
박철(54)씨의 시간은 2009년 6월 27일에 멈춰있다.
충북 충주에서 숲해설가 양성과정 13주차 교육을 마친 날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가구점을 운영하던 박씨는 2008년 충주로 귀농했다. 유치원 교사였던 아내 최옥자(53)씨와 집 앞 텃밭을 가꾸고 숲을 거니는 꿈을 그렸다.

하지만 박씨는 이날 오후 11시3분쯤 음주단속 과정에서 있었던 한 사건에 휘말려 범법자란 꼬리표가 붙었다.
단속 과정을 문제삼은 박씨와 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가운데 한 경찰관이 갑자기 팔이 꺽이는 자세로 고꾸라진 것이다. 당시 박씨는 숲해설가 과정 수료생들의 회식에서 술을 마신 상태였다. 운전은 아내가 했다. 박씨는 경찰관의 팔을 비틀어 공무집행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2011년 1월 대법원 확정 판결(벌금 200만원)을 받았다.

이 사건 발생 8년 4개월 만인 지난 28일 법원은 박씨의 공무집행방해 혐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전날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재심에서 7명의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박씨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다.
“팔을 꺾은 사실이 없는데도 경찰관이 혼자 넘어지는 (할리우드 액션)장면을 연출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던 박씨 부부의 주장이 인정된 결과다. 8년 동안 요지부동이던 법원 판단이 재심에서 뒤바뀐 이유는 뭘까.
11월 29일 오후 충주시 산척면에서 박씨 부부를 기자가 직접 만나봤다.

재심 청구 끝에 8년여 만에 무죄가 선고된 28일 박철씨(왼쪽 넷째)가 박준영(왼쪽 셋째)변호인 등과 재판정에서 환호하고 있다. [사진 최옥자씨 페이스북]

재심 청구 끝에 8년여 만에 무죄가 선고된 28일 박철씨(왼쪽 넷째)가 박준영(왼쪽 셋째)변호인 등과 재판정에서 환호하고 있다. [사진 최옥자씨 페이스북]

재심 판결에서 8년 4개월 만에 누명을 벗었다.
무죄 판결이 나왔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8년 동안 가족 모두가 고생한 일들이 생각나 울고 싶기도 했다. 재판부가 처음부터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해 좀더 세밀하게 판단해줬더라면 누명을 벗는데 8년이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이 찍은 캠코더 영상을 자세히 분석해 달라고 누차 요청했지만 누구도 귀를 귀울여 주지 않았다. 검찰과 법원이 ‘술취한 사람이 아무 짓도 안했는데 (경찰이) 생쇼를 했겠냐’ ‘누가 봐도 술취한 사람이 뭔짓(폭행)을 했구나’라는 전제 하에 사건을 들여다 본 것 같다.

8년 재판의 시작은 경찰의 음주단속에서 발단이 됐다.
박씨는 2009년 6월 27일 오후 11시 3분쯤 아내 최씨의 승용차를 타고 집에 가던 중 경찰의 음주단속을 받게 된다. 당시 술에 취한 박씨는 음주단속을 하던 경찰관 박모(48) 경사와 언성을 높이며 시비가 붙었다. 이 과정에서 박 경사가 팔이 뒤로 꺾인 자세를 취하며 고꾸라지듯 넘어지는 자세가 됐다. 이 장면은 동료 경찰관의 캠코더에 찍혔다. 이 영상에는 오른쪽 팔이 뒤로 꺾이며 쓰러질 뻔한 자세의 박 경사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판결의 쟁점이 됐던 팔을 꺾는 순간은 싸움을 말리던 박씨의 아들에 가려져 시비를 가리기 어려웠다.

2009년 6월 박철씨가 음주단속 경찰관과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한 경찰관이 오른쪽 팔이 꺾이며 고꾸라지는 자세가 됐다. [박철씨 제공 영상 캡처]

2009년 6월 박철씨가 음주단속 경찰관과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한 경찰관이 오른쪽 팔이 꺾이며 고꾸라지는 자세가 됐다. [박철씨 제공 영상 캡처]

2009년 당시 상황은 어땠나.
경찰의 위험한 음주 단속 방식에 화가나 차 안에서 두 차례 경찰관에게 욕설을 했다. 음주단속 입간판을 세우는 등 채비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 차를 갑자기 세워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경찰이 조수석에서 나를 끌어냈고 실랑이 중에 한 경찰관이 갑자기 쓰러졌다. 법정에서 ‘팔을 꺾지 않았는데도 경찰관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계속 주장해 왔지만 검사와 판사께서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영상을 언뜻보면 팔에 꺾여 고꾸라지는 것처럼 보여 오해를 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었고 진실이 밝혀질거라고 믿었다

박 경사는 박씨가 자신의 팔을 비틀었다고 계속 주장했다. 박씨는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 돼 2011년 대법원에서 벌금 200만원이 확정됐다. 아내 최씨는 남편 박씨의 재판 과정에서 “남편이 경찰관의 팔을 비튼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증언했다가 위증 혐의로 기소돼 2012년 12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이 판결로 최씨는 교육공무원직에서 당연 면직됐다.

아내까지 직장을 잃어 상심이 컸겠다.
나는 그렇다치더라도 아내가 26년간 몸담은 교사직에서 면직당했을 때 가장 미안했다. 벌금형 사건에 대한 위증 재판에서 징역형이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했고 당연히 아내는 무죄를 받을 줄 알았다. 아내 1심 재판에서 유죄가 나왔을 때 이튿날 장파열로 혈변이 쏟아졌다.

박씨는 아내의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참석해 또 다시 경찰 폭행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박씨 역시 위증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에 넘겨진 그는 2012년 4월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폭행 동영상과 경찰의 진술 등을 볼 때 공무집행방해 혐의가 인정되고 이를 부인한 법정 진술은 위증”이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생활은 어떻게 했나.
3개의 재판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법정을 자주 오갔다. 번번한 직장을 다니기 어려웠다. 충주에 있는 공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다 50㎞ 떨어진 진천·음성혁신도시 공사장에 나가 4년간 막노동을 했다. 오전 5시에 나가 늦게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는게 민망해서다. 아내는 월 100만원 정도를 받는 화장품 공장 생산직 일을 했다. 억울한 마음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2년전부터 여동생 운영하는 편의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내는 군포에 있는 공장에 다니거나 인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녀들도 정신적 고통이 만만치 않았겠다.
첫 사건이 작은 아들(26)이 고3때 벌어진 일이다. 그 짐을 딸(28)과 아들이 졌다. 아들은 처가 면직되고 나서 극심한 탈모가 왔다. 그 이후로 재판 얘기는 꺼내지도 않지만 지금도 당시 빠진 머리가 나지 않고 있다. ‘아빠 때문에 엄마까지 뭐야. 그냥 했다고(팔을 꺾었다고) 하자’고 말했을 때 아들과 다툼도 있었다.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박철씨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9일 오후 박씨가 그동안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박철씨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9일 오후 박씨가 그동안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박씨 부부의 고난은 2015년 8월 열린 박씨의 위증 재판 항소심에선 무죄를 받으며 반전을 맞았다.
변호인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화질 개선을 요구한 사건 동영상을 제시하며 박씨가 경찰관의 팔을 꺾지 않았다고 증명한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박 경사의 팔을 잡아 비틀거나 한 일이 없음에도 박 경사가 폭행을 당한 것인 양 행동한 것으로 볼 여지가 높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돼 박씨의 위증 혐의는 무죄가 확정됐다. 박씨는 이를 근거로 자신의 공무 집행 방해 사건에 대해서도 지난 4월 재심을 청구해 8년 4개월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닌건 아닌거다. 진실은 하늘이 알 것이고 눈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건 영상이 있으니 화질을 개선하고 속도를 늦춰서 보면 내가 팔을 꺾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생 속도를 6분의 1로 늦추고 화질 개선에 음성 분석까지 도와준 변호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오랜 재판을 거치면서 느낀 점은.
한 인터넷 기사에 ‘박철씨 끝까지 싸워서 사회 정의를 세워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댓글을 봤다. 하지만 나는 노동 운동을 하거나 사회 정의를 세우려는 거창한 뜻을 갖고 버텨온 것이 아니다. 나와 아내를 거짓말 쟁이로 만든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됐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뿐만 아니라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피해받는 시민들이 없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또 부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한 사람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박씨는 부인 최씨의 위증 사건에 대해서도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박 경사에 대해서는 위증 혐의로 지난 1월 고소했다.박 경사는 현재 충북의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법원이 경찰의 공권력을 지나치게 믿었던게 문제였다. 재판과정에서 과학적인 증거를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 사례”라고 말했다.

충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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