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파워' 20년 필리핀 마닐라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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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가운데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청년들이 25일 저녁 마닐라의 한 성당 밖에서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손에는 '구속자를 석방하라'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있다. [마닐라 AP=연합뉴스]

마닐라=최형규 특파원

레나토 미란다 필리핀 해병대 사령관이 26일 사임했다고 군 당국이 밝혔다. 해병대 대변인은 미란다 소장의 사임과 관련, 군 지휘부에 대한 정기 인사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군 고위 관계자는 쿠데타에 연루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5일 오후 5시쯤에는 라몬 몬타니오 예비역 장군이 친지. 가족들과 마닐라 시내 오차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 당국에 전격 연행됐다. 쿠데타 모의에 관련됐다는 혐의였다. 그는 라모스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보안대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 소식은 바로 라모스 전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라모스는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몬타니오는 풀려나지 않았다. 그동안 정권에 상대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보이던 라모스는 "새로운 마르코스 정권이 출현했다"며 강력히 싸울 것임을 선언했다.

◆ 반정부 인사 줄줄이 끌려가=몬타니오가 체포되고 두 시간 뒤에는 평소 정부 비판에 앞장섰던 크리스핀 벨트란 하원의원과 그의 부인, 경호원 등 5명이 자택에서 연행됐다. 역시 쿠데타 관련 혐의였다. 이 밖에 이번 쿠데타 기도 핵심 인물인 다닐로 림 준장도 붙잡혀 육군본부로 이송됐다. 24일 시위 주도자 중 한 명인 필리핀대학의 랜디 데이비드 교수도 체포됐다.

필리핀 언론은 지난 사흘 동안 체포된 유명 인사만 100명에 가깝다고 26일 전했다. 이와 관련, 필리핀 인콰이어리 등 현지 언론은 아로요 정부가 쿠데타를 빌미로 반정부 인사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언론도 예외 지대가 아니다. 24일 수십 명의 경찰이 마닐라 유력 일간지인 데일리 트리뷴에 들이닥쳐 토요일과 일요일 신문 발행을 중단시켰다. 필리핀 경찰청은 25일 어떤 언론사라도 정부가 선포한 비상포고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바로 정간 등의 조치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겉으론 평온 되찾아=26일 오전 11시 마닐라 중심부 엣샤(EDSA)거리에 위치한 피플파워(민중의 힘) 기념탑. 도로 중간에 경찰의 검문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탑 주위를 10여 명의 경찰이 감시했다. 경찰의 접근 금지로 인해 일요일인데도 행인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틀 전 5000여 명의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글로리아 아로요 정권 타도를 외쳤다.

경비 책임자인 포세 가르시아 경정은 "비상포고령에 따라 이곳에서 시위를 하면 누구든 체포해 사법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24일 발표된 국가비상사태 포고령은 시위를 원천 봉쇄하지는 않지만 집회 전에 반드시 신고를 하고 시위 도중 반정부 구호를 외치거나 유인물을 뿌리면 체포토록 규정하고 있다.

같은 시각, 기념탑에서 500여m 떨어진 피플파워 성지인 엣샤성당. 평상시 주일처럼 300여 신도가 미사를 보고 있다. 주위에는 10여 명의 경찰이 한담을 나누고 있다. 파출소장 폰체 아르만은 "포고령이 내려진 뒤에는 시위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마닐라=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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