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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엿가락처럼 휜 필로티 건물, 고쳐서 살라는 포항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장성동의 한 필로티 건물 1층 기둥이 뒤틀려 휘어진 철근을 드러낸 채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장성동의 한 필로티 건물 1층 기둥이 뒤틀려 휘어진 철근을 드러낸 채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규모 5.4 지진(15일)으로 건물 기둥이 엿가락처럼 휜 경북 포항시 북구 장성동의 한 필로티 건물. 집주인 A씨(45)에 따르면 최근 며칠간 건축업체 몇 곳이 다녀갔다. A씨가 부른 게 아니다. 포항시 측이 이 건물을 ‘재건 가능’으로 판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감을 찾아온 것이다. 이들은 최소 1억5000만원에서 최대 3억5000만원까지 부르며 “집을 고쳐주겠다”고 제안했다. A씨는 “현재로선 수리도 폐쇄도 불가능하다. 당장 전세금·보증금 빼줄 돈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진에 금 간 집 이주 판정 놓고 갈등 #시, 2차 조사 후 원룸 6곳 “재건 가능” #집주인은 “수리 지원금 없어져 막막” #세입자는 “이사 가게 전세금 빼달라” #전문가 “명확한 판정 기준 세워야”

지진 발생 열흘이 지난 포항에서는 금 간 집을 놓고 포항시와 집주인, 세입자 사이에 갈등이 싹트고 있다. 시측은 “재건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세입자는 “그래도 무서우니 금 간 집에서 나가고 싶다. 전세금을 빼 달라”고 집주인에게 요구한다.

이에 집주인은 “당장은 돈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세입자에게 사정하고 있다. 집주인은 포항시 측에 “여기서 어떤 세입자가 계속 살겠다고 하겠느냐. 이 원룸에 사는 주민들을 이주 대상으로 정해주고 건물주에겐 폐쇄금이나 수리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3각 갈등인 셈이다.

포항시는 지난 19일 이재민 주거안정 대책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집이 필요한 이재민을 500가구(1500명)로 추산했다. 이들 중 피해가 큰 북구 흥해읍 대성아파트 3개 동 170가구, 대동빌라 4개 동 75가구, 필로티 공법으로 지은 7개 원룸 83가구 등 328가구 이재민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주택 이주 대상으로 선정했다. 1차 육안조사 결과 거주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이에 따라 당초 필로티 건물을 포함한 원룸 7개 건물도 폐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2차 조사에서 1개 건물을 제외한 6개 원룸 건물이 ‘재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결국 이들은 지난 25일 포항시청에 찾아갔다. 이주 대상에서 제외되는 순간 수리 등 지원 금액을 거의 받을 수 없어서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자연재해대책법 등의 규정에 따르면 지진 등 자연재난으로 피해를 본 건물에 대해 전파 900만원, 반파 450만원, 소파(일부 파손) 100만원이 지원된다. 원룸 주인들은 “이 정도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를 이주 대상에 포함해달라. 그러면 전세금 융자를 1억원까지 받을 수 있으니 이 대출금으로 세입자들에게 전세금 등을 주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측은 “아직 잘 모르겠다. 기준을 마련하는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원룸 외에 일부 맨션 거주 주민도 집이 심하게 파손됐지만 ‘재건 가능’ 판단이 나왔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북구 한미장관 맨션 주민들은 “집 내부가 다 부서졌는데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럼 고칠 때까지 몇 달을 대피소에서 살아야 하는 데 말이 되느냐”고 시측에 항의했다. 전문가들은 주거대책에 대한 정확한 기준과 이재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입자·집주인 모두 지진 피해자다. 이들이 갈등을 겪지 않도록 제대로 된 기준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장 집을 잃은 이재민들에게 정부가 주거 대책을 충분히 설명해 납득시켜야 한다. 나아가 이번 지진을 통해 유사 재난 발생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갈등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포항=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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