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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어긋난 공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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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참여센터장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참여센터장

공감이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등장하는 시대입니다. 공감이 가득한 따뜻한 세상이기 때문이라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가 메말라 공감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더 단어가 넘쳐나는 듯합니다. 게다가 그 목마름 때문에 공감이라는 단어가 식상할 만큼 많이 사용되지만 제대로 된 공감이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이 넘쳐나는 홍수 때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 요소인 공감 #공감이란 단어의 홍수 속에 진정한 공감 드물어

워낙 공감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다 보니 타인의 마음에 공감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어긋난 공감이 많습니다. 첫째는 동정입니다. 공감(empathy)과 동정(sympathy)은 유사한 듯 보이나 분명히 다릅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함께’ 나누는 것임에 비해 동정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을 보며 가엾게 여기는 일방향의 마음입니다. 맹자가 설명한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서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일 수 있으나 동정심은 때로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킬 때가 있습니다. 나와는 다르게 너는 불쌍한 존재라는 태도는 높은 위치에서 내려보는 마음과 혼동될 여지도 있습니다. “쯧쯧쯧”이라는 소리는 때론 오히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기도 합니다. 함께 어려움을 나누기보다는 한 수 아래의 상대를 대하는 듯 섣부른 충고와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정은 타인의 불운과 고통에 대해서는 작동하지만 기쁨 같은 긍정적인 마음을 함께 나누지 못합니다. 불쌍하고 약한 상대에 대해서 동정만 할 뿐 좋은 일에 대해서는 질투하고 경쟁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둘째는 지나친 감정 이입입니다. 그야말로 ‘오버’해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당사자보다 더 심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감정의 주인공 역할을 뺏는 것입니다. 타인의 감정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대한 몰입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도하게 오열하고 분노한다면 정작 당사자는 감정을 표현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는 상황이랄까요!

셋째는 투사(投射)입니다. 공감을 핑계로 실제로는 자기의 느낌을 타인에게 돌리는 자기중심적인 방어기제입니다. 상대방의 실제 감정에 대한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이러이러한 느낌일 것이라 속단하고 확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제 멋대로 해석하고는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오히려 자신의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넷째는 생각의 이해 없는 감정만의 이입입니다. 진정한 공감은 타인의 느낌뿐 아니라 생각과 관점도 함께 이해합니다. 타인을 둘러싼 상황과 맥락까지도 넓게 고려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한 순간의 감정에만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긴 여정을 함께 걸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그 시선을 이해합니다.

다섯째는 폐쇄적 공감입니다. 공감 본성은 열린 마음이건만 끼리끼리의 집단 안에서 자신들만의 감정과 생각이 자가발전하며 확고해질 때 오히려 타인들과 격리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이 쉬워진 요즘 세상에서 닫힌 채팅방과 댓글을 통해 폐쇄된 생각이 강화되고 굳어지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거기에 가짜 뉴스나 편향적인 정보가 연료로 들어가면 집단 내의 감정이입은 왜곡돼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공감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며 보편적인 상식 위에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느낌, 생각과 입장을 나누는 공감은 대단히 선한 이타적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본요소입니다.

그러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이 필수적인 공감 능력을 우리 사회에 높일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어렵고도 긴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기는 어려우니 주말드라마가 흔히 쓰는 엔딩 방식을 빌려 말씀드리자면 ‘다음 이 시간에….’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참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