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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사선을 넘어선 탈출 : 요셉과 귀순 병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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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지난주 개인전을 마쳤다. 전시장 벽에서 그림들을 뗄 때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매번 밀려온다. 관객이 떠난 자리의 허탈감과 함께 언제 또 이런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불안감이 인다. 짐을 쌀 일이 꿈만 같아 넋 놓고 앉아 있을 때 전시장 입구에서 큐레이터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장식을 다는 것을 봤다. 곱고 예뻤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동방박사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장면 못지않게 줄곧 인용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기 예수가 나귀를 탄 마리아의 품에 안겨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함께 길을 떠나는 그림이다. 이 주제는 중세의 벽화들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숱한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초기 르네상스의 화가이자 수도사였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가 그린 ‘이집트로 향한 탈출’은 특히 이 테마의 전형을 보인다.

고향을 버리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는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평화롭고 안정된 모습이다. 요셉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이고 입힐 요량으로 온갖 살림살이를 챙겨 들고 묵묵히 성모자가 탄 나귀 뒤를 따른다. 그는 노동을 아끼지 않는 중세의 농부로 묘사됐다. 이에 비해 나귀에 오른 마리아와 예수는 성스럽게 묘사됐다. 두 손으로 아기를 귀하게 보듬고 거기에 얼굴을 가까이 댄 마리아는 모성의 본성을 넘어선 숭고함까지 자아낸다.

프라 안젤리코, 이집트로 향한 탈출, 1452년, 패널에 템페라화.

프라 안젤리코, 이집트로 향한 탈출, 1452년, 패널에 템페라화.

익숙한 집과 땅을 버리고 탈출하는 이들의 모습이 고통스럽기는커녕 왜 평온할까. 이들의 평화는 고향에서 자행된 영아 살육이라는 사선을 뚫고 이집트로 향하는 기나긴 피란의 여정에서 포착된다. 헤롯왕은 장차 메시아가 될 아기 예수의 탄생을 눈치채고 참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요셉 일가는 죽음의 세계를 등진 채 자유의 땅, 이집트를 향해 필사의 도망을 감행하는 중이다.

다급해야 할 탈출 길이 역설적으로 평온하게 표현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따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해 삶을 향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본능이다. 가축은 살기 위해 기꺼이 먹이가 있는 우리에 갇힌다. 하지만 인간만이 자유를 향해 죽음을 불사한다. 그 자유가 하늘의 뜻임을 일깨우기에 이 장면은 곧잘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용된다.

보름 전 북한의 젊은 군인이 목숨을 걸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날아드는 총탄에 등을 내놓은 채 자유를 향해 내달렸다. 그는 5발의 총탄이 몸에 박히면서도 이 길을 택했다. 그의 선택은 치명적이었다. 후방의 병원으로 옮겨져 5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그가 다시 깨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후 재수술을 받고 이제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됐단다. 지난주에는 그의 생생한 탈출 과정이 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젊은 군인은 자유를 위해 제 생명마저 희생하려 했다. 집도의(執刀醫)였던 응급외상전문의 이국종 박사는 그 군인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희생했다. 그는 집에도 못 가고 환자의 몸에서 쏟아지는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채 골절을 봉합하고 핏줄들을 이었다고 했다. 한때 그는 귀순 군인의 몸에 ‘기생충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공개해 일부 진보 진영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사소한 일이다. 어떤 비난도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숭고한 가치를 압도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의술은 존경받아야 할 고귀한 일이다.

하나의 생명을 살리는 적절한 의술이 그럴듯한 관념보다 훨씬 하늘의 뜻에 가까운 것 같다. 성탄은 2000여 년 전 희생의 실천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일깨운 한 인물의 탄생을 기념한다. 그는 말로 사람들의 심정을 두드렸고 행동으로 그 자유의 길을 알려 주었다. 나는 전시장 입구의 반짝이는 트리를 보면서 북한을 탈출한 병사를 위해 기도했다. 사선의 고비를 넘긴 그 병사가 빨리 회복해 이집트로 피란 간 아기의 생일을 함께 기뻐하고 제대로 누렸으면 한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