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음은 표밭에...알맹이 없는 입씨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5공화국에선 마지막이 되는 제138회 임시국회가 완연한 파장 분위기 속에 사흘간의 대 정부질문을 21일 끝냈다.
여야는 이번 임시국회에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임했다.
민정당은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선거법의 조속한 처리와 노태우 당선자가 약속했던 대사면을 위해 국회의 동의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야당은 1년만에 되살아난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사건과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자행된 정부·여당의 부정을 규명하고 정부의 농축산물 수입 개방책을 따질 심산이었다.
여야의 이러한 현실적 필요성 외에 이번 임시국회는 5공화국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6공화국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열린 만큼 전환기의 국회로서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우선 16년만에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있은 직후 열린 국회란 점에서 여야는 지난 선거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에 유의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5공화국의 생존을 1개월 여 남긴 시점에서 5공화국에 대한 여야의 역사적평가도 따랐어야 했다.
특히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는 6공화국을 목전에 두고 과거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민주화 시대를 예비하겠다는 몸부림도 감지되기를 기대했지만 질문과정에서 이러한 의미가 부각될만한 발언은 거의 들을 수 없었고 환골탈태의 몸부림도 찾을 수 없었다.
선거과정에서 표출됐던 생생한 목소리들은 어디 가버리고 녹음 테이프를 다시 튼 것 같은 지리한 질의와 답변뿐이었다.
마음은 이미 표밭에 가 있는 의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의장은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해야했고 임기 1개월을 남긴 행정부 쪽에선 종전에 볼 수 없었던「배짱답변」도 서슴지 않았다. 대 정부질문을 통해 의원들은 현정권이 마무리 짓고 넘어가야 할 가장 큰 문제로 광주사태를 꼽았다.
여야의원들은 『광주사태는 결자해지로 보아서도 현직대통령이 해결하고 나가야 한다』 (남재희 민정, 서석재 민주, 이영권 평민의원)고 촉구했으나 정부측은 다음 대통령에게 넘길 뜻을 비췄을 뿐 해결방안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었다.
야당이 벼르던 부정선거 규명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우선 공격하는 야당 쪽에서 준비가 부족했다. 관권개입·관제언론, 금품살포, 투표함 바꿔치기, 컴퓨터 조작설 등 막연한 단어와 소문만 나열했지 증거가 확실한 따끔한 사례 한가지 제대로 거론하지 못했다.
야당은 김정렬 총리가 『야당의 부정선거백서 발간을 기다리고있다』 『5만 명의 대학생이 투·개표 참관에 앞장서 부정을 막아준 데 감사한다』고 오히려 역공할 정도가 되어도 반박을 못하는 한심한 광경을 연출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정부측 답변 역시 『선거당시 공무원, 통·반장의 금품제공 행위는 없었다』(이상희 내무) 는 식의 내용뿐이었다.
부정선거 시비는 야당이 부정선거진상조사특위 구성을 제의해 놓고 있고 상위활동도 남아있는 만큼 회기 중 계속 재론될 전망이지만 입씨름에 그치고 말 전망이다.
경제분야질문에서 야당은 쇠고기·양담배수입 등 정부의 개방정책에 대해 『미국과 농산물개방에 비밀협약이 있다면 공개하라(이영준 민주의원)고 따졌으나 정인용 부총리는 『미국에 가서 쇠고기를 수입하는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는 실명을 했다』고 답변을 회피하다 소동이 벌어져 정회하는 사태도 빚었다.
야당은 의사진행발언까지 얻어 추궁 끝에 『관광용 쇠고기 수입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정부측 실토를 받아냈다.
우리정부가 지난해 초여름 쇠고기수입을 87년12월 이전에 재개할 것임을 미 측에 두 차례나 통보한 사실이 다 확인된 마당에 끝까지 감추려했던 정부의 구태가 다시금 확인됐다.
반면 야당은 농축산물개방 여부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개방이 어차피 불가피하다면 앞으로 축산·농가에 대한 대책, 소 값 파동의 재연 가능성 등 국민의 입장에서 불안과 궁금증을 풀어주는 쪽으로 회의를 끌고 가야 했는데 선거용 고성만 지르다만 느낌이다.
사회분야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사건을 놓고 야당은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선 이상의 관련을 집중 추궁했으나 시원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해 집권세력의 벽 같은 걸 실감케 했다.
야당의원들은 은폐 사실과 핵심적 관련이 있는 「관계자 대책회의」의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관계부처가 회의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없다』(김정렬 총리)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국정조사권 발동을 몇 번 약속했던 민정당도 결국 허약한 실상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사건에 대한 국조권 발동을 둘러싸고 민주당이 시한부상위거부를 선언함으로써 앞으로의 국회일정은 물론 국회의원선거법 협상에까지 적지 않은 파란이 예상되고 있다.
이번 질문과정에서 민정당 정책위의장인 남재희 의원이 『대통령 직선제가 과연 우리 실정에 적합한 제도인지 의회인 스스로가 곰곰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앞으로 구성될 13대 국회에서 선거제도를 포함한 여러 문제가 거론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밖에 민주당의 반형식 의원이 『정권인계 백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도 역사상 처음 있는 평화적 정부교체를 놓고 국회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주장으로 기억될 정도였다.
결국 국회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됐던 광주사태, 박종철군 사건, 부정선거 시비, 대미통상마찰 등 숱한 현안들이 전혀 걸러지지 못한 채 질문을 위한 질문, 답변을 위한 답변에 그친 감이 없지 않는 국회였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