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이자 금실 좋은 부부의 상징인 원앙이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걱정 탓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최근 전북 고창 농장의 오리와 전남 순천의 철새 분변에서 고병원 H5N6형 AI 바이러스가 검출되면서 방역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원앙·청둥오리 등 일부 철새는 고병원성 AI에 감염돼도 증상은 보이지 않고 대신 바이러스를 다량 배출하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AI가 농가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 철새 종(種)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중앙일보가 22일 입수한 국립환경과학원의 '국내·외 환경 중 야생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거동 예측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원앙의 경우 여러 가지 고병원성 AI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폐사하지 않고 고농도의 바이러스를 배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건국대 수의학과 송창선 교수 등이 작성해 국립환경과학원에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원앙을 대상으로 2010년 유행했던 H5N1 고병원성 AI 바이러스를 원앙 8마리에게 감염시킨 결과, 8마리 모두 살아남았다. 대신 감염 후 8일 동안 고농도의 바이러스를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16년에 유행했던 H5N6 고병원성 AI 바이러스에 노출했던 원앙 12마리 중에도 폐사한 것은 없었다. 원앙은 8일간 바이러스를 배출했고, 주변의 다른 원앙에게도 바이러스를 전파하기도 했다.
청둥오리 역시 2014년과 2015년에 유행했던 H5N8 고병원성 AI 바이러스에 노출했더니 8마리 모두 살아남았고, 감염 후 10일까지도 바이러스를 배출했다.
청둥오리나 원앙이 감염됐을 경우 직접 접촉하는 것은 물론 공기로도 바이러스 전파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특히 AI 바이러스의 유전자(RNA)를 중국 등 외국에서 검출된 바이러스와 비교한 결과, 중국 동부지역에서 국내로 유입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국립환경과학원 조류인플루엔자 관련 보고서 #"청둥오리와 더불어 AI 전파 위험 가장 높아" #감염 잘 되지만 내성 강해 폐사 가능성 낮고 #고농도 바이러스 배출로 공기 통해 전파시켜 #"철새 탓 할 게 아니라 방역 잘해야" 지적도
중국의 오리에서 한국을 경유하는 철새로 바이러스가 이동하고, 감염된 철새는 국내로 들어와서 다시 오리와 닭을 감염시킨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중국 가금류에서 한국 가금류로 직접 이동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원앙·청둥오리·흰뺨검둥오리·가창오리·홍머리오리·쇠오리·고방오리·큰기러기·쇠기러기·큰고니 등 10종을 주요 감시 대상 종으로 제시하고, 철새들이 도래하는 10~12월에 이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예찰할 것을 제안했다.
충북대 수의학과 모인필 교수 등도 지난 4월 국립환경과학원에 제출한 '야생 조류인플루엔자 발생 조기대응을 위한 정밀모니터링' 보고서를 통해 비슷한 제안을 내놓았다.
연구팀은 "청둥오리·쇠오리·원앙 등 오리류는 비교적 바이러스 내성이 강해 감염증상이 쉽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최근 일본과 중국 등에서 고병원성 AI 매개체로 주목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또 "원앙은 국내 텃새이자 겨울철에 찾는 주요 철새이기도 해 국내에서도 중점적으로 모니터링이 필요한 조류"라고 강조했다.
국립환경과학원 정원화 생물안전연구팀장은 "대부분의 오리류가 AI에 감염은 잘 되지만 죽지는 않고 바이러스 배출은 많이 하는 감수성 종"이라며 "청둥오리는 숫자도 많기 때문에 원앙과 함께 중점 감시 대상으로 삼고 예찰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한수 한국환경생태연구소장은 "같은 오리류라도 가창오리는 시베리아 북쪽 레나강 주변에서 여름을 지내기 때문에 AI 바이러스를 갖고 들어온다기보다는 국내에 들어와서 감염되는 '피해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철새가 바이러스를 옮기더라도 철새만 탓할 수 없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생태학자인 박병상 박사는 "볏짚을 비닐로 싸는 곤포 사일리지가 도입되면서 먼 길을 온 철새들이 먹을 게 없어 허약해지고 AI에도 잘 걸리는 것 같다"며 "AI 확산에는 좁은 면적에 많은 가축을 기르는 공장식 축산 탓도 크다"고 지적했다.
도요새·물떼새가 찾던 서해안 갯벌을 매립하고, 담수호와 농경지를 조성하는 바람에 오리류가 늘어난 것도 AI 확산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팀장은 "철새가 바이러스를 가진 것과 농가로 전파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철새가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는 가정하에 철저하게 방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철새 도래지를 중심으로 한 AI 위험지도를 작성하고, 서해안 등 철새도래지 인근에서는 가축 사육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kang.chans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