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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7)|동국대 일본 중국-사국 지방 학술기행 장한기<교수·동국대 박물관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오사카 공항에서 작은 프로펠라 비행기로 도쿠시마(덕도)에 내린 것은 지난해8월 24일, 해질 무렵이었다. 공항에는 이곳 민속예능학자이며 무용평론가인「히노키」(회영사)씨가 차를 갖고 마중 나와 주었다. 이곳은 벌써 네 번 째의 기항이다. l982년 처음 이곳의 아와오도리 (아파용)를 조사할 때도 이번 조사를 주관하고 있는 동국대 일본 학 연구소의 조사의뢰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을 지날 때면 그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그래서 우연히 알게된 것은 이곳엔 유독 한국의 성씨가 많이 살고 있다는 것과, 특히 임난 때에는 다른 곳과는 또 달리 이 지방 (덕도현) 을 비롯하여 가가와(향천현)·고치(고지현)·에히메(애원현) 등 시고쿠(사국) 일원에 전쟁포로로 끌려온 조선여인들의 애끊는 이야기와 그들 무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곳을 찾은 목적은 아파용 외에도 그들 포로로 잡혀왔던 여인들과 이밖에 자원해서 들어온 자들도 있어, 그 무덤을 찾아보고 그때의 정황을 알기 위해서였다.

<길이 30cm·폭15cm>
다음날 목적지로 예정한 성산이란 곳을 찾아갔다.
성산은 이곳에서 시 서쪽 40km 지점에 있는 마식군 천도정이란 곳이었다. 산에 올라보니 기암절벽, 바로 뒤엔 넓은 평야를 이룬 요시노카와(길야천) 푸른 물이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흐르고, 그 곳에는 옛날「도요토미」(풍신수길)·「도쿠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 등에게 계속 충성을 다했던 봉수하 가정이 축성하였다는 아파 구성중의 하나인 가와시마(천도) 성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이 성은 후에 다시 개축하였다 하나 이 성의 초대 성번(성주와는 다르나 말하자면 성을 책임지고 지키는 군)은「하야시」(임도감)란 자였다. 그곳에는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공적비가 서 있으니, 처음에는「오다·노부나가」(직전신장)의 문하에 있었으나 봉수하의 심복으로 돌아와 있을 적에 풍신수길을 도와 아파 국을 평정하고 후에 다시 조선정벌에 참전하여 두 번이나 공을 세웠는데 조선에서 선박과 많은 다기를 노획하고 조선의 여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와 이중 한 여인을 처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처가 된 한 여인이 말하자면 바로 지금 여기 임 도감의 공적비가 우뚝 선 그 옆, 잡초와 대나무 숲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후미진 곳에 「조선녀」라는 막돌(길이 불과3Ocm에 폭15cm)에 새겨진 이 세 글자를 이고 누워 있었다.
「히노키」(회영사) 씨의 사전연락으로 우리 도착 이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곳 문화재 보호심의위원인「나가노」(장야덕치)씨는『마직군사』에서 조선녀에 관한 기사만을 이미 복사해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에 의하면 그녀는 임 도감의 처로 그를 섬겼으며 일찌기 두 딸을 낳고 법사 하였다. 그의 죽음은 단지 이국의 한 여성이 고국을 그리다가 쓸쓸히 죽어갔다는 이 고장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적고있다.
필자가 덕도 에서만 우리의 무덤을 찾은 것은 모두 4기였으며 이 모두가 임난 때 포로로 끌려온 조선여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신분들은 대개 양가의 규수가 아니면 관기들로서 14, 15세에서 17, 18세의 어린 나이 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간 왜장들에 의해 풍신수길의 첩으로 바쳐졌다가 다시 버림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데리고 살았던 여인들로 기구한 이역에서의 한을 안고 간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긴 하였다. 마직 군 성산에서 돌아온 그날저녁에는 마침「히노키」씨와 동행하여 시 남쪽 가쓰우라카와(승포천) 건너 해안에 있는 가고(농) 라는 곳을 찾아갔다.

<친일파후손 딸도>
이곳은 태평양 깊숙이 반도처럼 휘어져 들어간 대원정 농이라는 마을로 거기에는 시내에서 천황당이란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오쿠야마」(오산예삼)씨의 본래 시조가 조선인이란 사실과 그의 가족묘지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 이르니 첫눈에 묘비의 모양이 일본 것과는 상이했다. 그들 묘비의 전통 양식에는 탑 모양의 것이 없다. 대개는 위가 3각으로 밋밋하게 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묘는 우선 기 단위가 3층 석탑으로 돼 그 모양이 특출했다. 묘비에는「고려십십성주, 산전응천국천천왕말손, 오산요우위문처, 오산여오낭모, 항년팔십륙세속명나가」라 적혀있다.
비문의「고려수토이란」경상남도 창원의 와부이라고 재일 한국인 학자(신기수 등)들은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무덤은 조선의 한 성주였고 후일 일본에서 산전응천국 간천왕으로 자칭한 임난 당시 친일 부역했던 자의 한 후손의 딸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비문을 두고 재일 한인학자 중에는 필자와는 다르게 해석, 묘비의 주인공이 바로 성주의 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묘비의 북면에 조각된 다음과 같은 글귀로도 곧 착오인 것이 드러난다. 거기에는「문구이무년…윤팔월구일」이란 기록이 있다.
문구2년은 서기로는 1867년, 우리 연호로는 철종13년에 해당한다. 이 해로 말하자면 이 묘비를 세웠거나 아니면 이 묘비의 주인공이 죽은 해라고 추측하면 앞에서 말한 임난 때와는 너무나 많은 연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필자가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그 외 후손인 예삼씨와 또 그의 출가한 딸 일색자씨를 만나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그의 몇 대째 조모이자 또 그 조모의 선대에 해당하는 조선인 성주는 일본에 건너와 당시 친일과 부역의 공으로 풍신수길에게서 하사 받은 일본도 하나를 가보로 대대로 보관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보관자는 후손 오산 예삼씨가 아니고 대판으로 출가한 그의 딸이었으며 그의 딸 칠자씨는 지금까지 알려진 조상이 단순한 성주의 딸이었다는데 불만을 갖고 왕손인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 다음날 오사카에서 공노로 도쿠시마까지 와주었고, 가옹로 소장하고 있다는 치욕적인 칼의 사진과 그 외 몇 가지 유품들을 자랑삼아 보여주고 돌아갔다.
이와 같은 예는 아주 일본인이 되어버린 그들 후예들에게 아직도 많이 숨겨져 있는 비밀로 강제로 끌려와 피맺힌 한을 안고 돌아간 무수한 여인들의 설움에 비긴다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기록은 거의 없어>
그 다음날은 시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다이니치지(대일사)로 갔다. 이곳은 필자가 덕도에 오면 언제나 들렀던 곳이다. 수년 째 친분이 두터운「야마구치」(산구활) 부부도 만나볼 겸, 그리고 그 인근 마을 간사이지(관정사) 경내에는 또 한기의 조선여인의 무덤과 비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그 날은 민단부단장인 김일성씨가 직접 거를 몰고 동행해 주었고 우리는 대일사 식구들과 함께 40도가 가까운 여름 해를 이고 아쿠이카와(점합천) 부근 뉴다초(인전정)에 있는 관정사를 찾아 나섰다. 절 울안에는 한 모서리에 많은 묘비들이, 무성한 풀숲에 가린 채 즐비하게 있었다. 언제나 친절한 이 마을 모씨가 낫으로 풀을 베고, 많은 비 가운데서 조선여인을 기린 비하나를 찾아냈다.
거기에는 비문 자체에 마모가 심하여 확실치는 않으나 어쨌든「…고려관여야」란 글씨만은 어렴풋이 보였다. 그 이외의 내력은 알 수도 없었지만 이 역시 임난 중에 포로로 잡혀온 여인임엔 틀림없었다. 이 절에도 알 수 있는 사람이나 기록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내가 묵고있는 대일사로 그 마을(입전정)의 공민관장이며 이러한 자료 모으기를 취미 삼아 한다는 근등충남씨가 찾아왔다. 그는 어제 방문했던 관정사에서 약7백m 지점인 점음천 변에 또 하나 조선여인의 무덤과 비가 있다며 그것을 필름에 담은 사진 몇 장을 전해주고 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무덤 속에는 본래 황금 옷과 많은 보화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모두 도굴되어 없지만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에서 굉장한 신분의 소유자였을 것이며 당시 조선에는 이와 같은 많은 보화가 있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때 일본인들은 전쟁에서는 비록 조선의 많은 사람들을 잡아오고 또 많은 보화를 노략질하여 승리감에 들떠 있었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고도 한 문화유산에 대한 동경과 그 존경하는 마음은 실로 대단하였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진 속에 나타난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차인춧크 토크이내소인, 속명전요복」(이 사람은 조선에서 온 사람으로 그 속명은 전요복) 이다.

<풍신수길에 바쳐>
덕도에서 다카마쓰(향천현 고송)로 향하던 중 필자는 시모다카오카(하고강)라는 조그마한 한촌에서 내렸다. 이 곳에도 임난 중에 잡혀온「오소에(대첨)·「고소에」(소첨)라는 한 자매의 무덤과 묘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져온 이들 자매의 유품가운데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박물관에나 전시될 가마 두 채와 조선조 목기와 장롱, 그리고 다기 중에서도 색색자기인 호리 주전자와 다완 두개 (하나는 적갈색, 또 하나는 순백색), 테가 직경50cm를 넘는 갈잎모자(여자용), 그밖에도 이들이 소지했던 호신불, 안에서 딸랑딸랑 소리나는 작은 경전 등 무려 30여종이 현존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그 예전 한국여성 생활문화의 편린들로서 그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를 현재 보관하고 있는 이는 이들 자매의 방계 후손인「와타나베」(도변순흠)옹이며 그 의 구옥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옹의 말을 빌자면 매년 8월15일에는 그의 할머니들을 위해서 제단을 한국 쪽으로 향해 배설하고 제사를 드리며 그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한다.
자매의 무덤은 그의 구옥에서 약 3, 4백m 밖에 있지만 원래는 더 가까운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겼는데 묘비 아래에는 불교정전 『법화경』을 한자 한자 조약돌에 새겨 넣은 돌의 분량이 약 일곱 개의 들것에 실릴 정도였다 한다.
유물 및 불경은 모두 국가 중요문화재 이상의 것으로서 당국에서는 이를 몇 번이나 중요문화재지정을 종용해 왔다 고도 한다.
그리고 이들 자매야말로 현존한 그들 유품으로 미루어보아 조선양반 가의 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려서 끌려와 풍신수길에게 바쳐졌다가 그의 버림을 받았다는 바로 그 주인공이며 이곳 외진 섬에서 평생의 한을 안고 살아간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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