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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다시 태어나야…"자책과 반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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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경찰이 흔들린다.
허위보고·금품갈취·수사무능·인권유린·고문치사…. 민주사회의 치안기구로선 있을 수 없는 범죄적 비리가 한꺼번에 폭로되는 가운데 전직 총수가 형사피의자로 구속되는 충격적 사태를 맞아 국립경찰이 밑바닥에서부터 동요하고 있다.
「창설 43돌만의 최대위기」라는 경찰의 동요는 이 같은 사태를 필연적으로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경찰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뼈아픈 자책과 반성, 그리고 진정한 「민주」경찰로의 재탄생, 새출발을 위한 환골탈태, 대수술을 갈망하는 요구로 집약된다.
강민창 전 본부장이 검찰에 소환된 14일 이후 경찰의 총 본산인 치안본부는 사실상 업무정지상태.
「설마」가 사실로 급진전, 강본부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16일 구속되자 치안본부는 상·하 없이 경악의 분위기였고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엇갈렸다.
상층간부들 사이에선 『도대체 이 모든 책임을 왜 경찰만 져야하는가』하는 울분과 항변이 우세했고 중간이하 소장간부와 직원들 사이에선 『이대로는 안 된다. 일대 개혁의 대수술 없이는 겅찰이 설 자리가 없다』는 쇄신·개혁의 주장이 우세했다.
이와 관련, 강본부장 구속이 보도된 16일 상오 권복경 치안본부장과 차장 등 수뇌 간부들이 한때 사무실을 비우고 잠적, 「사태와 관련해 집단사표를 냈다」는 뜬소문이 나돌아 확인소동이 벌어지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확인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내부의 동요는 심상치 않다. 경찰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개학과 함께 움직임이 있으리라는 얘기 등 동요는 상·하로 넓게 파급될 기미다. 경찰은 박종철군 사건 사태처리에 대한 검찰 등 정부관계기관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다.
한 경찰간부는 『그동안 경찰업무가 경찰의 의사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느냐』고 반문했다 .제5공화국 출범 후 정권안정의 필요에 따라 경찰의 기구·인력이 크게 늘어나고 업무·권한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은 대부분 외부에서 내려왔고, 경찰은 그것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아온 것이 아니냐는 항변이다.
이른바 「대책회의」로 불리는 의사결정 기구가 사실상 경찰조직과 경찰업무의 지휘탑 노릇을 해왔다는 것은 경찰 내부에선 이론이 없는 공통인식. 경찰업무에 대한 외부의 간섭은 이 같은 지휘부에서의 통제 외에도 말단의 자잘한 사건처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에서 알게 모르게 미쳐왔다고 경찰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외부 입김에 좌우되는 권력의 하수인이란 자화상에 대해 자책과 반성도 나오고 있다.
『경찰이 제 밥그릇도 못 찾아 먹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이란 주장이다. 이는 「사명감도 없고 능력도 모자라는」 간부들에 대한 불신, 그와 연관해 객관적 공정성을 결여한 인사풍토에 대한 성토로 연결된다.
한 소장간부는 『경찰내부에 우수한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동안 경찰인사는 그런 우수 인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지연·혈연 등을 따라 권력에 충성스런 인사가 중용되는 분위기였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조직 상·하간에 인사와 관련, 불신과 냉소의 분위기가 팽배하고 거기서 상사를 속이는 허위보고·직무유기 등이 별다른 죄책감 없이 저질러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 소장간부는 『미국·일본에 갔을 때 아파트 출입문이나 승용차 문이 안 열려도 경찰에 신고하면 즐거이 달려와 고쳐주고 가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특히 일본경찰은 법집행 실무자 역할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 「윤리교사」로서도 존경받는데 충격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또 한 간부는 『지난해 박군 사건 후 여러 가지 개선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는 미흡했다. 최근의 수원경찰서 고문사건을 보고 일선경찰관의 구태의연한 자세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며 『앞으로는 경찰내의 썩은 가지는 과감히 쳐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의 재출발 논의는 경찰이 자신의 의사대로 본연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보장하는 정치적 중립화를 위한 제도개선에 집중되고 있다. 『경찰은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에 경찰을 살리는 획기적인 제도개선·체질개혁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한 젊은 간부의 목소리는 절박한 위기감을 담고 있었다. <김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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