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리카와 아야의 서울 산책

낯선 이와도 나눠 먹는 한국서 4박5일 … 일본 학생들, 위안부 피해 할머니 만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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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김장의 계절이 도래했다. 한국의 어떤 점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여러 가지 답 중 하나가 ‘나눠 먹는 문화’다. 그중에서도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친척 등 여러 사람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김장이 대표적이다.

음식을 먹을 때 혼자 먹지 않고 되도록 누군가와 같이 먹으려고 하는 것도 한국의 좋은 문화다. 고속버스를 탔을 때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갑자기 자신이 먹으려던 삶은 계란과 귤을 나눠준 적도 있다. 일본에선 모르는 사람한테서 음식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한국에선 너무나 당연하듯 주고받는 게 신기했다. 한국 친구한테 이 상황을 이야기하자 그는 “혼자 먹는 게 더 이상하다”고 말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유학생인 내가 외롭게 혼자 밥을 먹는 건 아닌지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다. 집에서 만든 반찬이라며 갖다주거나 외식할 때마다 불러 준다. 그럴 때면 배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고 가득해지는 느낌이다. 일본에서도 일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았지만 내가 밥을 잘 먹는지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일본 사람은 대부분 집에서나 밖에서나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하다.

음식을 나누다 보면 대화도 나누게 된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보다 한국에서 말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도 나눠 먹는 문화 때문인 것 같다. 최근에 그것을 실감한 일이 있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학생포럼에서의 일이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사나 방송국에 취업하고 싶은, 혹은 이미 취업이 정해진 대학생들이 모여 4박5일 동안 같이 먹고 자면서 그들만의 취재를 해보는 행사였다. 나는 학생들이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을 돕는 역할로 참가했다.

일본에서 온 학생 중에는 일본 유학 중인 중국 학생들도 있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한·중·일 3개국 학생이 모이게 됐고, 처음엔 어색해했던 학생들은 4박5일을 같이 지내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마지막 일정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 중 한 장만 골라 그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몇몇 학생들이 비슷한 사진을 골랐다. 밤늦게 호텔 방에 여러 학생이 모여 술과 안주를 먹으며 토론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일본 학생들은 평소 정치·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처음으로 같은 세대의 외국 학생들과 토론한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중 학생 대부분이 일본 정치 상황이나 역사에 대해 잘 아는데 나는 너무 모른다”고 부끄러워하는 일본 학생도 많았다.

토론 내용을 물어봤더니 “일본 정부는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하는가”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학생들의 취재에 응한 할머니가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을 원한다”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나눔의 집 방문 전날 밤 일본 여학생 두 명이 내 방에 찾아와 ‘어떻게 질문하면 할머니께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같이 고민했다. 사실 할머니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만나는 것도 힘들 수 있다고 들었다. 열심히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말해 뒀는데 뜻밖에 할머니가 “질문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라” 하시더니 몇 십 분 동안 자신의 피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흐름이 끊길까 봐 녹음해서 나중에 번역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는 한국어로만 들었는데 일본 학생들은 못 알아들으면서도 우는 학생이 많았다. 표정이나 어조만으로도 느끼는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할머니를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나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일본 학생 대부분이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는 정치 문제로 보도됐고 나도 남의 일처럼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제 피해국인 한·중 학생들과 같이 먹고 자고 토론하면서 절대 남의 일이 아님을 느꼈을 것이다.

함께 나눠 먹으며 낯선 이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한국의 문화가 처음 본 학생들 간의 입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리게 한 것 같다.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동국대 대학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