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서울 '센트럴파크'를 꿈꾸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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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책이나 영화를 통해 특정 도시나 장소에 대해 환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영화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해외여행이 어렵던 시절 사람들은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을 통해 로마에 대한 동경을 품었고, 잉그리드 버그먼과 험프리 보가트가 열연한 '카사블랑카'를 보면서 미지의 도시에 대한 이국 취향을 키웠다.

얼마 전 뉴욕에 갈 일이 생겨 인터넷으로 호텔 예약을 하면서 맨해튼의 센트럴파크가 보이는 호텔이 대폭 할인된 가격에 나와 있기에 두번 생각 않고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했다.

센트럴파크를 내게 처음 각인시킨 것은 영화 '러브 스토리'였다. 알리 맥그로와 라이언 오닐은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뛰게 했고, 두근거림은 영어공부를 빙자한 원서 읽기로 이어졌다.

눈 내리는 센트럴파크 스케이트장 벤치에 홀로 앉아 제니를 회상하며 올리버가 내뱉은 "What can you say about a twenty-five year girl who died? That she was beautiful and brilliant. That she loved Mozart and Bach. And the Beatles. And me…"는 30년이 흐른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독백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센트럴파크 공식 홈페이지(www.centralparknyc.org)에 따르면 1908년 이후 센트럴파크에서 촬영한 장면이 들어 있는 영화는 모두 1백75편에 달한다.

센트럴파크 부지는 원래 모기가 들끓는 습지였다고 한다. 쓰레기 하치장 주변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했다.

맨해튼의 급속한 산업화와 이민 인구의 급증으로 각종 도시문제가 대두되던 19세기 중반 뉴욕 '이브닝 스타'지 기자였던 윌리엄 컬렌 브라이언트는 맨해튼에 공원을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했다.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50년 후 이곳에 같은 규모의 정신병원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시 당국은 맨해튼 한복판에 가로 0.8㎞, 세로 4㎞의 직사각형 땅을 매입해 1858년 공사에 들어갔다.

현재 맨해튼 면적의 6%에 해당하는 8백43에이커(약 1백4만평)의 땅에 93㎞의 산책로와 2만6천그루의 나무, 36개의 인공호수와 연못, 8천7백개의 벤치, 21개의 놀이터가 조성돼 있다.

'뉴욕의 허파'인 센트럴파크는 숨막히는 도시생활에 지친 시민들의 정신적.신체적 안식처이면서 사색과 놀이가 어우러진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파리의 불로뉴 숲이 파리시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녹지 공간인 것과 마찬가지다.

호수를 따라 조깅하는 사람,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주부, 벤치나 풀밭에 앉아 독서하는 뉴요커들을 바라보면서 서울을 생각했다.

용산 미군기지가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게 되면 생기는 약 1백만평의 땅에 다행히 서울시는 공원을 조성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행되기 전까지 많은 논란과 난관이 예상된다.

서울시의 결심이 정치논리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금싸라기 같은 맨해튼 한복판에 센트럴파크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은 몇 세대 앞을 내다본 혜안과 개발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신념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미국의 정전 사태로 예약한 호텔의 시설이 정상 가동되지 못하는 바람에 센트럴파크 옆 숙박의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의 '센트럴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하며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떠올릴 날을 염원해 본다.

배명복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