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기 대규모 전시회 … 다시 보는 화가 변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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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의 그림에는 떠도는 나그네가 자주 나온다. 깊은 산, 눈 내린 마을, 봄빛 가득한 들판, 누런 가을 논두렁 할 것 없이 허청허청 방랑하는 중늙은이가 등장한다. 두루마기에 갓 쓰고 지팡이 든 노인장은 후줄근하다. 높은 산이나 너른 들에 비기면 점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그가 풍경을 움직인다. 보잘것없는 그로 해서 산수는 숨을 쉰다. 이 점경인물(點景人物)은 변관식 산수화의 고갱이이자 화가의 초상이다.

전통 산수의 세계를 근대 실경으로 끌어오려 평생을 바친 화가, 일본색을 몰아내고 민족미술을 일으키려 고군분투한 야인, 미술계의 불의를 고발하고 세상에 돌아앉았던 고집쟁이 변관식의 모습이 거기 있다. 소정은 그림 속 노인처럼 이상향을 찾아 헤매었으나 구부정한 등허리에는 삶의 쓸쓸함이 배어난다.

40여 년 만에 발굴돼 선보인 소정 변관식의 1960년대 초 작품 ‘설경’. 시커멓게 보일 만큼 먹을 쌓아올리고 깨던 평소 화풍과 달리 빈 공백으로 눈 내린 풍경을 표현했다.

작가가 타계한 뒤 30년 만에 다시 공개된 73년 작 ‘단양팔경’ 가운데 한 폭.

'소정, 길에서 무릉도원을 보다'(5월 7일까지 서울 정동 덕수궁미술관)에 나온 80점 대표작에서 종종걸음치는 노인은 한결같다. 변관식의 30주기를 맞아 다시 돌아보는 그의 회화정신 또한 여일하다. 소정은 그림으로 한민족의 유토피아를 찾았던 떠돌이다.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소정의 방랑을 "식민지 경험, 내전, 압축성장으로 연속되는 격동의 세월" 때문으로 본다. 동서양이 마주치고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며 하나의 민족이 두 나라로 분단된 시절을 관통한 화가의 고뇌가 길 위를 떠도는 점경인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회고전을 꾸린 기혜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금강산의 작가'로만 국한되던 소정을 한국적 이상향에 대한 꿈을 완성한 작가로 넓게 보자는 뜻을 담았다"고 말했다. 새로 발굴한 '설경(雪景)'이나 사후 30년 만에 다시 공개된 '단양팔경' 을 보면 먹과 필을 넘어서 보는 이를 무릉도원으로 데려가려는 화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시커멓게 보일 지경으로 먹을 겹쳐 그으며 쌓아올린 뒤 속된 기운을 없애려 진한 선을 긋고 점을 찍어 선을 깨뜨리던 소정 특유의 화법과 양식마저 넘어선 '설경'은 이번 전시의 백미다.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린' 백색 공간을 예의 노인장 둘이 유유자적 노닌다. 깨달은 자의 자유와 고독이 눈꽃으로 피었다.

이번 전시는 199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소정과 금강산'전 이후 변관식의 회화세계를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는 첫 시도로 뜻깊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이나 방법을 배우기 전에 시대를 사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던 천생 반골의 목소리가 전시장을 울리고 있다. 02-2022-060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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