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힘들었다. 한국미술이 서구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60년대 후반 미국에서 한국 회화를 연구한다는 건 말 그대로 암중모색.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 한국 산수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저서 28권(편저 포함), 논문 117편을 내놓으며 한국미술사의 기초를 다졌다. 홍익대(76~83), 서울대(83~2006)에서 후학들도 지도했다.
45년의 세월이 지났다. 안휘준(66) 교수가 28일 20여 년 몸담았던 서울대에서 정년 퇴직한다. 20일 저녁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는 '청년정신'을 강조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있습니다. 후학들이 두렵다는 뜻이죠. 요즘 연구자들의 실력은 제 어릴 때와 비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저는 후배들이 두렵기보다 사랑스럽게 느껴져요. 그들의 젊은 연구열이 좋습니다. 그래서 후생가애(後生可愛)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그는 현대미술에도 관심이 크다. 요즘에도 중요한 전시가 있으면 빼놓지 않고 간다. 전통회화를 연구한 학자답게 현대작가들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으로 '한국성'을 들었다.
"한국 현대미술이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 만들었다는 색채가 없으면 더 이상 클 수 없습니다. 국적불명의 미술로는 승부를 걸 수 없죠. 당연히 작가들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한국 사상.전통에 대한 학습이 필수적이죠. 그림은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머리가 풍요로워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강세황.김정희 등 옛 화가들은 뛰어난 사상가였습니다. 그들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간다'(讀萬卷書 行萬里路)를 모토로 삼았습니다."
안 교수는 다음달부터 명지대 석좌교수로 새 출발을 한다. 서울 관악구청 옆 오피스텔에 개인 연구실도 차렸다. "그간 못했던 여행도 가고 싶지만 '한국미술사' '한국회화사' 영문판 준비에 시간이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학문에는 정년이 없는 것 같다.
박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