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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된 『채식주의자』 한국·터키, 문학으로 통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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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16면

한강의 『채식주의자』 터키어판 표지. 지난 2월 터키에서 출간돼 1만 부 이상 판매됐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터키어판 표지. 지난 2월 터키에서 출간돼 1만 부 이상 판매됐다.

아이돌 그룹 콘서트장도 아닌데, 문을 열기 전부터 행사장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한국 책을 전시한 주빈국관에는 히잡을 쓴 소녀들이 말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난 4일 터키 이스탄불 튜얍 컨벤션센터에서 개막한 2017 이스탄불 국제도서전. 첫 인상은 의문문이었다. 도서전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한 #2017 이스탄불 국제도서전

한국과 터키가 수교를 맺은 지 올해로 60년. 정서적으로는 친밀한 두 나라지만 양국의 문학과 출판 교류는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일부터 12일까지(한국관은 7일까지) 열리는 이번 도서전은 양국 출판계가 소통을 시작한 자리로 기억될 듯 하다. 인산인해를 이룬 도서전은 어려운 정치적 상황 하에서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터키의 출판 시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올해로 36회를 맞은 이 행사에 주빈국으로 초청된 한국은 252㎡(약 76평) 규모의 전시관을 차려 큰 호응을 얻었다. 소설가 김애란·손홍규·최윤, 시인 안도현·이성복·천양희 등 한국 작가 6인이 준비한 행사도 책을 들고 찾아온 독자들로 북적였다. 그 현장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유럽과 중동 지역에 불고 있는 한류 바람은 새로울 게 없지만, 현장에서 확인하면 늘 놀라움을 안겨 준다. 이스탄불 도서전에서 만난 많은 소녀들은 “K팝과 한국 드라마는 터키 10대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콘텐트”라며 “반 아이들 중 ‘BTS(방탄소년단)’와 ‘엑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중학생 멜레카 아르자(15)는 “한국 문학은 전혀 모르지만, 한국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도서전에 왔다”고 말했다. 히잡을 쓰고 책가방을 멘 소녀들은 한국인 스태프들과 사진을 찍고, “한국에서 가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손에는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등 한국 인기 드라마를 소설로 옮긴 책을 들고 있었다. 터키 출판사 올림포스가 수입, 번역해 출간한 것들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윤철호)가 운영한 한국관에는 문학 서적을 비롯해 인문·어학·잡지 등 140여 종의 책이 나왔다. 한국 대중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도 한국 문학은 아직 미지의 영역. 그러나 손홍규의 『이슬람 정육점』, 안도현의 『연어』, 황석영의 『바리데기』 등 터키에 소개된 한국 시집·소설 15종을 전시한 부스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한다는 베툴 세다 우스타(23)는 “한글은 정말 아름다운 언어”라며 “한강, 김애란 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지난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 소개되며 터키 문학 붐이 일었다. 터키에서도 지난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이 작품을 터키어로 번역한 괵셀 튀르쾨주 터키 에르지예스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대중문화를 통해 싹튼 관심이 양국의 활발한 문학 교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국과 터키는 전통과 가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다”고 했다.

이번 도서전에서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가진 김애란 작가도 조심스레 기대를 내비쳤다. “다른 나라에 대한 애정은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다. 처음엔 좋은 모습을 보고 친해지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민도 이야기하고 부끄러운 모습도 보여주며 더 가까워진다. 터키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대중문화에서 시작됐지만, 그 우정의 마지막 순서에는 문학이 놓여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침 김 작가의 단편집 『침이 고인다』는 올해 안에 터키어로 출간될 예정이다.

급성장하는 터키의 책 시장, 한국에도 기회

이스탄불 국제도서전은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 등의 도서전과 비교할 때 명성에서는 뒤지지만 행사 규모나 열기는 못지 않다. 800개 넘는 출판사가 차린 부스에는 매년 5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지난해에는 62만 명이 다녀갔다. 2016년 터키에서 발행된 신간은 5만 4446종으로 한국(7만 5727종)의 70% 수준이지만 출판사 수와 발행 종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터키출판협회의 케난 코자튀르크 회장은 “지난 10년 간 터키의 출판은 급성장하고 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보급에도 젊은 사람들이 도서전을 찾고, 책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것은 무척 희망적”이라고 했다.

이토록 성황인 이유는 이스탄불 인구만 1800만 여명에 달하는 데다 교육기관들이 학생들에게 도서전을 적극 권하기 때문이다. 아직 도서정가제가 도입되지 않은 터키에서 도서전은 책을 3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풀어야 할 문제도 많다. 이번 도서전에 참가한 여러 터키 출판인들은 현 에르도안 정부의 표현의 자유 억압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코자튀르크 회장 역시 “한 나라의 문화가 성장하려면 누구나 공포를 느끼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도서전에서는 한국과 터키 출판사들이 직접 만나 비즈니스를 논의하는 매치메이킹 행사도 열렸다. 한국출판사 7개, 20여 개의 터키 출판사가 참여했다. 행사에 참가한 양원석 알에이치코리아 대표는 “문학 뿐 아니라 한국 동화책이나 학습서에 관심이 높았다”고 했다. 시급한 것은 번역가 양성이다. 현재 한국-터키어 번역가는 괵셀 교수와 오르한 파묵의 책을 한국어로 옮긴 이난아 씨를 포함해 다섯 명 정도에 불과한 상황이다. 이난아 씨는 “『채식주의자』 성공 후 터키 출판사에서 한국 소설을 출간하고 싶다는 연락이 자주 온다. 지금이 한국 문학을 터키에 알릴 적기”라며 “정부 차원에서 터키어 번역가 양성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식주의자』 터키어판 낸 에이프릴의 베리완 악 편집장
“주인공 억압하는 가족에 여성들 공감”

한강의 『채식주의자(터키 제목은 VEJETARYEN)』 터키어판을 출간한 에이프릴(April)은 터키에서 3위 안에 드는 문학 전문 출판사다. 6일 도서전에서 에이프릴의 나즐르 베리완 악(36·사진) 편집장을 만났다.

『채식주의자』를 출간한 계기는.
“맨부커상을 타기 전부터 유럽에서 화제가 된 이 작품을 눈 여겨 봤다. 상을 받은 후 ‘역시’ 하는 마음으로 출간했다. 현재까지 1만 부 정도 팔렸고, 발행 부수는 1만 5000부다. 이번 도서전에서도 인기가 아주 많다.”
왜 인기일까.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터키 여성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주인공을 억압하는 가족은 터키와 매우 유사하다. 터키의 문학 독자 층이 주로 여성이라 여성 문제나 사랑 이야기에 호응이 높다.”
주목하는 한국 작가가 있는지
“한강의 『소년이 온다』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정유정, 신경숙 작가를 눈 여겨 보고 있다. 터키에서는 추리물이 인기라 그 분야의 책도 집중적으로 찾고 있다.” 

이스탄불(터키) 글·사진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대한출판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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