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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트럼프, 공은 북한으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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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31면

에버라드 칼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은 북핵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는 데 기여하고 있을까.

틸러슨 국무장관 질책했던 트럼프 #압박과 대화 ‘강온양면’으로 변신 #대화채널 복원은 북한 정권의 몫 #미국은 아직도 군사옵션 배제 안해

일단 트럼프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 트위터나 TV에서 도발적인 언행을 늘어놨던 트럼프는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지금까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8일 한국 국회 연설에서도 그는 즉흥적 유혹에 이끌리는 대신 철저하게 정제된 연설을 했다. 프롬프터를 꼼꼼히 읽으면서 말이다. 또 이번 순방을 통해 트럼프는 새롭게 다듬어진 대북 정책을 북한에 제안했다. 두 달 전만 하더라도 트럼프는 렉스틸러슨 국무장관이 협상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한다고 질책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 와서 북한과의 대화 채널이 열려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 내 외교정책 일관성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북한 문제를 둘러싼 평화적 해결방안을 찾는 ‘빅 스텝’이 될 것이다.

트럼프는 강력한 압박도 빼놓지 않았다. 북한의 위협에 맞서 ‘가능한 모든(full range)’ 군사적 옵션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국회 연설에서 그는 “미국의 도시들이 북한의 파괴 위협에 시달리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지레 겁먹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이 얻으려는 무기(사드)는 한국을 더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북한은 지금 당신들의 정권을 위협으로 몰고 있다”고 말했다.

국무부를 비롯한 미국 내 정책 담당자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군사 옵션이 최후의 수단으로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레토릭이라고 설명한다.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을 상대로 한 압박 전술의 일환으로 군사 옵션을 제외하진 않고 있으나, 현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프롬프터에 적힌 “하나님을 앞에 두고 말하건대 미국은 결코 군사적 옵션을 쓰고 싶지 않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분명 의미가 있다.

로널드레이건 함을 비롯한 항공모함 3척이 동해를 떠다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미 항공모함이 동해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북한은 어떠한 도발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중국과 북한은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이 실제로 전개되는 과정을 눈으로 목격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을 집약하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방망이를 갖고 다녀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의 21세기 버전으로 볼 수 있다.

미 당국자들은 더 이상의 탄도미사일 실험은 북한 입장에서도 실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이상 미국을 상대로 북한의 핵무기 역량을 확인시키는 일이 불필요한 일일 뿐더러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중립적 견해까지 거둬들일 것이란 명분에서다. 북한은 현재 한반도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와 아랍 국가에서 상당한 양의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만약 이들 국가마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북한과의 교역을 끊는다면 북한 경제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북한을 상대로 한 국제 사회의 경제제재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지난 9월 조선노동당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자신의 연설 대부분을 경제에 할애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지난달 7일 조선중앙통신은 “내각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개입 정책은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앞서 틸러슨 국무장관은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해 최고 수준의 압박과 함께 개입 정책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반관반민의 1.5트랙 이전에 정부 인사가 직접 참여하는 공식 대화채널(1채널) 또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주 유엔 북한대표부 간 뉴욕 대화 채널을 들 수 있다. 미국은 현재 이 채널을 열어 놓은 상태지만,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놓고 미국과 실질적으로 대화하길 희망한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시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으로 돌아와보자. 일부 소식통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 간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에 관련해 어떠한 것도 발표되지 않은 점에 비춰볼 때 양국 정상이 북핵과 관련,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하진 못했을 것이라고 전해 왔다. 이는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최근 폐막한 제19차 공산당 대회 이후 시 주석의 권력이 훨씬 강력해졌으나 중국 지도자가 공식석상에서 북한과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일반인들은 두 정상 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진전이 아예 없었을 수도 있고, 광의의 합의만이 존재했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북한은 침묵을 지켰다. 단 한 차례의 도발이나 미사일 발사도 없었다. 4일 성명에서 “미국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고만 했다. 이전과 비교해 온순한 톤이다. 항공모함 3척으로 자신들을 위협하면서도 대화 채널을 열어 놓은 트럼프 앞에서 평양은 자신들의 레토릭 수준을 낮췄다. 익명의 북한 관리는 미 CNN에 “트럼프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일정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관찰했을 것이다.

국제 사회의 제재 조치로 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이 핵 프로그램을 일시 중지하고 대화 테이블로 들어올 수 있을까. 만약 북한 정권이 대화를 택할 경우, 평양 내 정치적 소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북한이 그간 주장한 대미 적대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이 대화 거부 의사를 뒤집는다면 북한의 고위 지도부는 대내외적으로 약하게 보일 뿐더러 김정은의 말을 뒤집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북한이 또다시 탄도미사일 실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미국은 북한이 ‘레드 라인’을 넘을 경우, 군사 옵션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평양에 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까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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