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문화와 예술 "전통 속에서 창조적 힘 찾는다"|좌담으로 엮어본 변화와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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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4면에서 계속>80년대의 우리 문화는 문학·예술·학문, 그리고 전통이 현대적 수용 등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변모를 보여주었다. 문화가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어야 하며 소수의 전문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일부 계층에서만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민중적·대중적 기반에서 창조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인식이 80년대 문화의 큰 줄기를 이뤄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88년 새해를 맞아 특집좌담으로 문화예술인 4명이 참석한 『80년대의 문화의식』을 실어 80년대 문화의식의 변화와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 그리고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전망을 해보았다. 【편집자주】
김=그런 흐름 속에서 생산된 80년대 문화의 성과들을 하나 씩 점검해 보도록 하지요.
우선 80년대 문학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체계가 깊이 파급되고 민중문학의 논리가 심화되어 갔다고 큰 맥을 얘기할 수 있을 겁나다. 소설에서 박경리씨의 『토지』가 올해 완간예정이고, 황석영씨의 『장길산』, 김주영씨의 『명주』같은 역사대하소설들은 역사를 어떻게 보고 민중의 지위를 어떻게 설정하여 민중의식을 투영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큰 성과로 보여집니다.
또한 분단의 상황과 통일지향이 작품속에 깊이 있게 반영된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김원일씨의 『겨울 골짜기』등이 주목을 끌었고, 시에서는 기층민의 현장적 작업이 큰 성과를 이루어 박노해를 비롯해 장애자·농민·노동자의 창조적 작업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유=미술계의 상황은 문학과 좀 다릅니다. 문학이 60년대 후반부터 자기변혁과 심화의 길을 걸어온 큰 흐름이 형성된 데 반해 미술은 80년대에 여러가지 요소가 한꺼번에 쏟아졌어요. 신학철·임옥상·민정기·김정헌 같은 작가들이 기존 조형문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테두리에서 리얼리즘적 사고를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일관한 반면 광주의 홍성담, 서울의 김봉준은 민중미술의 새 형태를 제시하고 나왔어요.
또 광주의 「시각매체」나 서울의 「두렁」은 공동작업이라는 새로운 창작방식과 굿그림 같은 새로운 장르,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을 계발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이뤘습니다. 근래에는 만화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획득해가고 있어요.
임=사실 마당극의 탄생과정도 민중문화를 지향하는 의지 속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봐야해요. 이것이 나름대로 성공하고 보니까 이것을 억압하던 제도권에서 받아가는 예도 생겼어요.
그러나 이 경우는 민중문화의 성과를 제도권이 수용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오히려 변질·왜곡시켰다고도 볼 수 있어요. 이를테면 진짜 마당극은 공동체의 문제를 속 시원히 다루어내야 제 모습이 살아나는데 가령 텔리비전 마당극을 보면 민속·해학적 코미디, 기생 코미디 따위로 몰고 가려는 느낌이 들거든요.
유=임 선생 자신이 연출한 마당극 『밥』이나 창작 판소리 『똥바다』도 80년대 예술의 큰 성과라고 보고들 있습니다. 이애주씨의 춤 『바람맞이』는 어떻습니까.
임=춤의 예술적 성과는 춤 전문가에게 맡겨야겠지만 그것이 극장에서 추어질 때는 사회성이 예술성 안에서 구현돼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는데, 지난해 6월 서울대 출정식과 이한열·이석규 장례식 현장에서 추어질 때는 사회적 쟁점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되는 선례라고 느꼈습니다.
최=80년대 문화에서 이룬 사회·과학의 발전은 참으로 획기적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복사기에 의한 대량보급, 출판문화운동의 활성화, 대학인구의 증가라는 외적인 작용도 크지만 내적으로는 금기시되어온 진보적인 이론의 대담한 수용, 그리고 무엇보다 인문사회과학도들이 현실의식·역사의식을 심화시키면서 얻어낸 성과라고 봅니다.
김=80년대 문학을 온건히게 정의하면 60년이래 억압·소외·상실을 겪은 지식인의 저항이 80년대 민주화의 의식 속에서 수렴하고 여기에서 현실거점을 획득하며 민중적 사고법에 다가서는 방향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 예술전반의 분포를 보면 ▲전통적 순수예술 내지 본격예술 ▲민중예술 ▲언급은 잘 하지 않지만 대중예술로 분류될 겁니다. 순수예술은 작품의 예술성이나 질에서 우세가 보이고, 민중예술은 이념과 논리에서 강하며, 대중예술은 소비·향유에서 압도적 강세입니다. 이 3자가 서로 비방·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하면서 높은 질을 모색하는 것이 과제가 아닐까요.
유=저는 민중예술 전반에 놓인 과제는 지난 기간 제도권으로부터 박해도 받고 예술창작의 편의가 차단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과격성·공격성·투쟁성을 이제 창조적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진짜 민중의 심성에 다가서는 것이 무엇이고, 그 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며, 통일을 지상의 과제로 하는 그림의 소재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깊이 성찰하고 공부하고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임=일반인들이 민중예술에서 투쟁성을 비대하게 강조해 보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않나 싶어요. 사람이 빼앗기면 싸우게 마련인데 그렇다고 싸우는 것만이 그들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다른 삶의 양태도 있는데 그 풍부한 민중의 삶을 우리는 골고루 담아가야 합니다.
싸움의 정서를 담아낼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그 사상·이념을 포괄하는 큰 그릇으로서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문화운동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최=학문적인 과제라면 서구의 이론을 수용하여 그 논리로 우리 현실을 해석해보려는 시각을 교정해 이제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제현상을 가치체계로 논리화하고 이론·이념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더욱 추진해야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전, 우리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르네상스적 재해석이 필요할겁니다. 그 토대를 어디에서 찾을까는 분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전통의 가치를 진짜 뿌리에서 뽑아내 오늘의 삶과 생각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당면한 대과제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정부 문화행정의 담당자들은 이점에 주목하여 우리 고전의 번역·출간사업이나 문화 유산의 보급을 적극 펴나가야 할 줄로 압니다.

<참석자>
김병익<문학평론가>
유홍준<미술평론가>
임진택<마당극 연출가>
최재현<서강대·사회학>

<정리=유홍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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