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혈하려 女 환자 바지 내린 병원 수련의 ‘선고유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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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중인 여성 환자의 혈액검사를 위해 바지를 내리고 채혈을 시도한 대학병원 수련의(인턴)에게 법원이 유죄(벌금형 선고 유예)를 확정했다. 의사의 의료행위가 성욕을 자극하거나 만족하게 하려는 동기나 목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야기할 만한 행위를 했다면 강제추행죄의 고의가 인정된다는 판단이다.

환자 동의 없이 바지 내려 '동맥 채혈' 시도 #대학병원 인턴,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돼 #법원 "추행의도 없었다 해도 성적 자유 침해" #의료목적 등 고려해 벌금300만원 '선고유예'

대법원 3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대학 병원 수련의 김모(35)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벌금 300만원의 선고를 유예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김씨는 2015년 10월 전남의 한 대학병원 감염내과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입원환자 이모(29)씨의 혈액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바지를 내린 혐의로 기소됐다.

이씨는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로 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혈액검사를 위해 채혈을 시도하면서 “피를 많이 뽑아야 하니 정맥이 아니라 동맥 채혈이 필요하다”며 사타구니에서 채혈해야 하니 속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 일반적인 채혈은 정맥이 지나가는 팔뚝에서 채혈하지만 채혈량이 많을 경우에는 골반 부위를 지나는 동맥에서 피를 뽑기도 한다.

강제추행 일러스트 [중앙포토]

강제추행 일러스트 [중앙포토]

불쾌한 마음이 든 이씨가 “꼭 사타구니에서 뽑아야 하느냐”며 주저하자 이씨는 그렇다며 갑자기 침대에 누워있던 이씨의 환자복 바지를 잡아 내렸다. 이씨는 이를 제지하면서 거듭 거절 의사를 표했고, 결국 팔의 정맥에서 채혈했다.

이틀 뒤 김씨는 병실을 다시 찾아와 다시 채혈을 시도했다. 김씨는 혈액이 응고돼 팔에서 정상적인 채혈을 하기 힘들어 다시 골반에서 채혈해야 한다며 바지와 속옷을 함께 내리려 했다. 이씨는 깜짝 놀라 김씨를 제지한 뒤 병원에 요구해 여자 인턴에게 채혈을 받았다. 그런 뒤 “김씨가 동의 없이 바지와 속옷을 내려 성적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며 김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1심 법원은 “피고인이 의료행위를 목적으로 피해자의 하의를 내렸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동의 없이 기습적으로 하의를 내리는 행위는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추행 혐의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다만 추행의 정도가 비교적 가볍고, 초범인데다 의료행위를 하는 과정이었단 점을 참작해 벌금 300만원에 선고를 유예했다.

김씨와 검찰은 1심 판결이 부당하다며 항고했지만 “제반 양형조건을 종합해 보면 원심의 형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서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기각했다. 대법원도 “원심의 판단이 강제추행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원심을 확정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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