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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공론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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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조성진 경성대 에너지학과 교수는 3년 전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서 나노과학 국제 공동연구 때의 일화를 잊지 못한다. 그는 가끔 프랑스 과학자들과 어울렸다. 어느 날 프랑스 과학자의 친구인 경찰 부부를 만났을 때다. 원전이 화제에 올랐다. 조 교수는 “1970~80년대 우리가 프랑스에서 원전 기술을 많이 배워 왔다”고 했다. 그러자 경찰 부부가 발끈했다. “그렇게 배운 기술로 프랑스보다 더 싼값으로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을 팔아먹었다”며 “당신들은 기술 도둑이다”라고 했다. 조 교수는 당시 “두 번 놀랐다”고 했다. “일반인들까지 원전 산업 내용을 꿰고 있다는 게 첫 번째요, 원전 기술에 대한 국민적 자부심이 그렇게 크다는 게 두 번째였다.”

30년 먹거리 팽개치는 일 #국민적 합의로 결정해야

그 프랑스인들이 질시하는 한국 원전 산업의 운명이 내일 결정 난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내놓을 권고안은 셋 중 하나다. ①공사 중단 ②공사 재개 ③유보. 어떤 결론이든 혼란과 반발이 불가피할 것이다.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③유보부터 보자. 471명 시민참여단의 의견이 6~8%의 오차범위 내에서 팽팽할 경우다. 이때는 ‘현상 유지(Status quo)’ 공사 재개가 답이다. 오차범위 내라면 굳이 현재 상황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게 여론조사의 정설이다. ②공사 재개라면 어떨까. 혼란이 있겠지만, 수습 가능할 것이다. 이미 청와대는 “공론화위의 결정과 관계없이 탈원전 국정 기조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탈원전 쪽은 전투에는 졌지만, 여전히 전쟁엔 이길 수 있다.

문제는 ①공사 중단 때다. 일자리와 먹거리를 잃은 과학·산업계의 반발이 거셀 것이다. 법적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산업 기반이 무너져 수출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원자력 업계는 2030년까지 우리에게 열릴 세계 원전 건설 시장만 약 100기 600조원, 운용 시장까지 포함하면 2000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도 주무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입만 열면 탈원전이요, 최대 500조에 달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입찰 설명회엔 서기관급을 보낼 정도다. 그러니 어느 나라 장관이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조성진 교수는 “우리 원전 기술은 지금 수준만 유지해도 향후 30년 세계 최고를 지킬 수 있다”며 “얼마나 잘살게 됐다고 나라의 30년 먹거리를 팽개친다는 말이냐”고 했다.

더 근본적인 일도 있다. 탈원전에 대해 국민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정부 스스로 이번 공론조사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 여부’에 한정한다고 밝혔다. 탈원전은 국가 백년대계에 속하는 사안이다. 1년이든 2년이든 장시간에 걸쳐 국민 여론을 제대로 파악할 진짜 ‘숙의 여론조사’가 필요하다. 이번 공론조사는 출발부터 삐걱댔다. 기울어진 운동장 논란도 컸다. 팩트 체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투명성도 의심받을 수 있다. 공론화위는 1·2·3차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 혐의가 짙다. 4차 여론조사도 5일 뒤 발표한다. 아무리 보안을 잘 유지한다지만 중간에 결과가 오염될 여지가 있다. 원전 재개 측이 참관 요청도 했지만 공론화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결과에 대한 반발을 자초한 셈이다.

그러니 행여 이번 공론조사 결과가 ①공사 중단으로 나와도 이를 탈원전의 국민적 찬성으로 정부가 호도하는 일은 부디 없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원전 산업을 무력화하면 후대에 두고두고 원성을 살 수 있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선 환영받을 수도 있다. 아마 프랑스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기회가 되면 문재인 대통령은 프랑스를 방문해 보시라. 혹시 아나. 프랑스 국민들이 자국 원자력 산업을 부흥시킨 일등 공신으로 환영해 줄지. 프랑스 대통령도 못 해낸 일을 했다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