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시인 정일근 vs 소설가 방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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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상으로는 울산시에 속해 있지만, '이장님 방송'이 동네 구석구석 울려퍼지는 시골 마을인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어(詩語)를 가다듬어 온 정일근(45) 시인은 '날아오르는 산' 등 18편의 시로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다.

암울했던 1980년대의 노동현장, 학생운동 등에서 베트남으로 소설적 관심의 폭을 넓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장도 지냈던 소설가 방현석(42)씨는 역시 베트남을 무대로 한 소설 '존재의 형식'으로 올해 황순원문학상 후보가 됐다.

두 사람은 쇠고기 값이 돼지고기 값을 밑돌 정도로 '소값 파동'이 심각하던 97년같이 소를 잡아먹었다. 소를 키우던 방씨 집에서 한마리 잡자 울산 선배인 정씨 등이 찾아가 지천인 육고기로 배를 든든히 한 것이다. 상대방 눈치 볼 일 없고 격식 차릴 것 없는 두사람은 시원시원하게 '문학 문답'을 이어 나갔다.

방씨가 먼저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등 강렬했던 초기의 시가 아프고 나서는(97년 현장기자로 울산 현대자동차 파업 등을 취재한 정씨는 98년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부드러워졌다가 이번 후보작들에서 다시 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물항의 길' 같은 시에서는 예전의 정일근다운 서정성이 보이지만 '날아오르는 산''동안거' 같은 시들은 시적거리를 좁혀 육박해 들어가 시와 대결하려는 시인의 각오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번 시편들을 "한 고비를 넘어 새로운 지경으로 나가려는 출사표"라고 진단한 방씨는 "정선배는 현실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면서 서정성을 잃지 않은 흔치 않은 경우"라며 슬그머니 치켜세웠다.

정씨는 "아직도 이런 소재로 소설 쓰는 소설가가 있냐"며 분위기를 바꿨다. 배려와 칭찬은 심심한 것이다. '존재의…'은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밟아 온 운동권 동지 세명에 관한 이야기다.

베트남에 정착해 통역.가이드 일을 하는 재우는 변호사로 성공해 베트남을 찾은 과거의 동지 문태가 속물이 돼버렸다고 치부, 둘 사이에 갈등이 싹트지만 10년 동안 베트남 해방전선 게릴라로 미군과 싸웠던 시인 반레를 만나면서 화해하게 된다.

정씨가 "군더더기 없는 건강한 문체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리얼리즘 작가가 남아있다는 게 반갑다"면서도 "그런데 요즘 이런 소설이 팔리냐"고 다시 삐딱하게 찌르자 둘 사이에 잠시 "팔린다" "안 팔린다" 말들이 오간다.

방씨는 "그동안 우리의 생각이 닫혀 있었다. 베트남을 통해 우리 현실과 객관적 거리를 둘 수 있다"며 "집단의 이상이 무너진다고 해서 개인의 삶, 개인의 아름다움이 무너지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약하나마 스스로의 조명으로 주변 1㎝라도 비출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통해 개인과 집단,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를 좁혀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다음번 베트남 동행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글=신준봉,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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