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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행정도시, 이제 지역주의 선거 전략에서 풀어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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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행복도시와 지방선거

세종시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걸까.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니다. 중앙정부기관 20개와 소속기관 20개, 연구기관 15개. 중앙정부 3분의 2가 옮겨 갔다. 하지만 정부의 핵심 기능인 청와대와 국회는 서울에 남았다. ‘길 과장’ ‘길 국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개헌하면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안 돼도 국회 분원, 행자부 이전” #문 대통령, 5당 원내대표 공감 #김대중, 71년 공약으로 처음 제안 #박정희, 행정수도 계획 세웠으나 #10·26으로 모든 계획 물거품 돼 #대선 때마다 선거전략에 이용 #지역주의, 당략 얽혀 왜곡 심해 #행정부 분할 따른 부작용 더 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약한 새 수도는 이게 아니다. 행정수도라고 할 수도 없다. 일부 외청이 입주했던 대전청사와도 다르다. 현장과 전문가들로부터 떨어진 갈라파고스. 책상 위에서 정책을 만든다. ‘무두(無頭)’는 기강 해이를 걱정하게 한다.

이런 문제를 모두 인정한다.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도 같다. 지난 대선 때 후보들이 입을 모았다. 개헌하면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하겠다고. 개헌 이전에도 국회 분원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회가 ‘길 과장’을 만든 주범이라고 본 것이다.

걱정은 내년 6월이 지방선거라는 점이다. 행정도시는 선거 때문에 곡절을 겪어 왔다. 옮긴 것도 아니고, 안 옮긴 것도 아닌 지금의 세종시는 정치인들의 표 계산에 누더기가 됐다.

선거전략으로 왜곡된 행정수도

역대 대통령과 행정수도

역대 대통령과 행정수도

행정수도 구상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1971년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먼저 내놨다. 그는 당시로는 충격적인 공약들을 쏟아냈다. 중앙정보부 폐지, 향토예비군과 교련 폐지, 육성회비 폐지, 4대국 보장론, 지방자치제 실시…. 그러면서 그는 대전을 ‘행정 부(副)수도’로 하겠다고 공약했다.

명분은 안보와 균형발전이다. 한강 이북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켜 전략적 안전을 도모하고 균형 있는 국토 개발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4월 3일 대전 유세에서 1단계로 행정부 외청, 2단계로 일부 행정부를 순차적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그의 말대로 거의 이뤄졌다. 문제는 선거다. 이 공약을 대전에서 꺼낸 것도 그 때문이다. 충청도 지역 표를 생각한 것이다. 97년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발전한 그런 전략이다.

행정도시 문제가 지역주의라는 고질적 ‘적폐’의 세례를 받는 순간 정상적인 추진이 어려워졌다. 어느 한 후보에게 유리하면 다른 후보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행정부처 배치는 국가의 장기 발전전략으로 도모할 과제다. 그러나 선거전략이 되면서 ‘닥치고 찬성’과 ‘닥치고 반대’만 남았다.

박정희의 이루지 못한 꿈

행정수도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급속한 산업화로 70년대 중반 이후 수도권이 포화돼 비효율이 늘어났다. 휴전선에 너무 가까워 안보상 문제도 제기됐다. 이런 이유를 내세워 당시 박 대통령은 77년 2월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후보지를 압축했다. 지금 세종시가 들어선 바로 옆이다. 그러나 79년 10·26 사태로 운명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소극적인 행정기구 이전은 계속됐다. 문제의식은 남았다는 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전을 행정타운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91년 대전을 행정 기능 중심도시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외청들이 옮겨 갔다.

표의 유혹은 계속됐다. 92년 김영삼 민자당 대선후보가 공약으로 꺼냈다. 대전을 제2행정수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93년 대전의 정부 제3청사 건립공사를 시작해 98년 청 단위 이하 11개 중앙행정기관을 이전했다.

71년 행정수도를 공약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작 98년 취임 이후에는 10여 개의 청 단위 이하 중앙기관만 이전했다. 외환위기라는 재정적 부담에다 남북 정상회담에 따른 통일수도의 꿈이 커졌기 때문이다.

대선 때 재미 좀 봤죠

결정적인 한 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2년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수도 이전을 내걸었다. 지방자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는 매우 야심 찬 정책이었다. 그러나 선거공약이 되는 순간 달라졌다. 여론을 수렴하고, 자기 생각을 설득하고 가다듬어 조율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2003년 11월 신행정수도 국정과제회의에서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대선 때 재미 좀 봤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선거에 이용하려고 이 정책을 꺼낸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스갯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한마디로 득표를 위한 꼼수가 돼 버렸다.

그가 선거 때 ‘재미’를 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충청도가 고향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대전과 충남북에서 모두 노 후보에게 졌다. 행정수도 공약의 힘을 표로 확인시켜 준 셈이다. 그러니 그 이후 전개도 선거전략에 따라 춤출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와 국회가 있는 곳이 수도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가 수도 이전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없던 일로 하고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헌재가 밝힌 위헌요소를 피하면서 최대한 원안을 살린 수정안을 냈다. ‘행정중심복합(행복)도시’다.

헌재는 수도를 ‘관습 헌법’이라고 했다.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는 국회와 행정을 통할하며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소재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수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 특히 결정적 요소”라고 밝혔다. 수정안은 헌재가 지적한 청와대와 국회를 서울에 남게 했다. 정부부처도 3분의 2만 옮기기로 했다. 이런 타협안이 행정 비효율이라는 새로운 부담을 남겼다.

수도 분할은 이전보다 더 나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부터 수도 이전을 단호히 반대했다. 행복도시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에도 그는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고 싶다” “수도 분할은 수도 이전보다 더 나쁘다”고 비난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이후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수정하려 했다. 문제는 야당이 아니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보탤 것 뺄 것 없이 원안대로”라며 수정안을 반대한 것이다. 결국 수정안은 부결됐다. 박 전 대표에게는 충청권 표가 다음 대선을 위해 절실했다.

지역주의는 고질적이다. 풀기가 너무 어렵다. 행정도시는 지역주의와 바로 연결돼 있다. 땅값과 고용, 지역 발전 문제가 다 걸려 있다. 너무 예민하다. 그럴수록 국토의 균형발전, 정부의 효율적 운영 등 장기적인 국가 발전전략으로 다뤄야 한다. 다 알지만 너무 멀리 왔다. 이 시점에서 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길 과장’은 사라졌나?

세종청사 공무원의 한 해 평균 국내 출장비는 약 200억원이다. 지난해 한 신문이 사무관 이상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출장 가는 사람이 10명 중 8명이었다. 국토연구원 자료로는 10번 중 8번이 서울 출장이다.

서울 출장은 실·국장이 많이 간다. ‘길 과장’ ‘길 국장’이 서류를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 휴대전화로 결재한다. 한 전직 장관은 “옛날에는 과장·국장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실수가 있으면 엄하게 꾸짖고 가르쳤는데 요즘은 엉성하더라”라며 걱정했다.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는 것도 문제다. 기업과 대학·연구소·대사관…. 심지어 외국에서 주요 인사가 방한해도 서울에만 머물다 떠난다. 갈라파고스에서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미래를 열어 갈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통신수단이 발달했다. 화상회의도 늘었다. 그렇지만 형식적인 보고가 대부분이다. 보안 문제도 있고, 한국적 정서도 있다. 대면회의를 대체하기 어렵다. “대면보고가 필요하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질문에 대답해 보라.

가장 큰 문제는 지역주의

현재로선 해결방법이 두 가지다. 정부청사를 서울로 되돌리자는 주장은 거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만 되면 ‘세종시를 행정수도, 서울을 경제수도’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개헌이 되지 않아도 국회 분원과 행정안전부 등을 추가로 이전해 행정중심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지난 5월 19일 여야 5당 원내대표를 만나 문 대통령이 이런 뜻을 재확인했다. 공감도 얻었다. 개헌 여부에 따라 길이 갈리게 생겼다. 어느 쪽이건 이제라도 선거전략에서 벗어나 논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지난 7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는 헌법조항 신설을 물었다. 전문가는 64.9% 대 35.1%로 찬성이 많았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찬성 49.9% 대 반대 44.8%로 팽팽했다. 쉽지 않다는 말이다.

김부겸 행자부 장관은 일단 2년 내 행자부를 세종시로 옮기겠다고 했다. 21일 관련 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국회 분원 설치를 위한 국회의 용역조사 결과도 11월에 나온다. 이 정도만 돼도 ‘길 과장’ ‘길 국장’이 많이 준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청와대 없이 행정 중심도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청와대 집무실을 설치해도 형식적 회의에만 쓰일 가능성이 크다. 현장과 국내외 전문가들로부터의 고립도 해결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중 수도’를 거론한다. 윤수정 공주대 교수는 세종시 출범 5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이중 수도 개념을 활용해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 행정수도는 세종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은 상징수도, 세종시는 실질 행정수도로 하자는 것이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 “수도를 서울로 하더라도 행정수도는 분리해 세종시로 하자”고 말했다.

갈등의 본질은 지역주의다. 행정도시뿐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효율성을 갉아먹는다. 정치적으로는 선거법을 고치는 게 가장 급하다. 소선거구제에서 표의 등가성을 강화하는 제도로 바꾸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그것이 개헌을 풀어 가는 길이기도 하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