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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한령 맞서려면 … 중국 2·3선 도시 깊게 파고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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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새 정부가 출범하면 좀 나아지겠지’ 하던 생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로 촉발된 한·중 경색 국면이 지속되면서 한한령(限韓令·한류 규제령)도 철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중국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기를 구가하던 한류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세가 됐다. 그동안 중국 내 한류는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인가. 한류 없는 중국 대중문화의 판도는 현재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새 정부 출범에도 한·중 경색 지속 #한한령 철회 기미 보이지 않아 #중국에서 한류 빠져나간 빈자리 #중국 콘텐트가 채워 가기 시작해 #우리는 고품질 콘텐트 개발하며 #대만 우회전략 구사도 검토해야

한·중 합작이 사라진 중국 영화 시장은 할리우드와 일본·중국 영화가 점령했다. 9월 둘째 주 중국 박스오피스는 1위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비롯해 5위까지 할리우드 영화가 휩쓸었다. 10위권 내 중국 영화 4편, 일본 영화 1편이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박스오피스보다 중국 관객의 선호도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 ‘바이두’의 이달 중순 ‘인기 영화’ 50위권에도 할리우드 영화가 즐비하다. 네티즌 검색 횟수를 토대로 인기 순위를 보여 주는 이 목록은 중국 관객이 더 이상 한국 영화를 찾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김주원 기자 zoom@joogang.co.kr]

[김주원 기자 zoom@joogang.co.kr]

한한령 이후 한·중 영화 교류는 전면 중단 상태다. 한 한국 영화 관계자는 “물밑작업조차 없다”고 전했다. 중국 측 영화제 관계자도 “난망한 상황”이라며 “윗선에서 당분간 한국과의 교류는 추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TV 드라마도 전멸 상태다. ‘아이치이’ ‘유쿠’ 등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의 한국 코너엔 철 지난 콘텐트 일색이다. 지난해 하반기 타임슬립 장르를 중심으로 중국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춘 콘텐트를 개발코자 했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 드라마가 빠져나간 자리를 중국 콘텐트가 채우고 있다. 세 번이나 다른 삶을 살며 사랑을 이어 간다는 이야기인 ‘삼생삼세십리도화(三生三世十里桃花)’는 아이치이 기준으로 112억 회나 클릭됐다.

또 1990년대 청춘들의 고뇌와 사랑을 그린 ‘춘풍십리도 그대만 못해(春風十里不如你)’는 유쿠 기준으로 52억 회 방영됐다.

예능 프로그램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런닝맨’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중국 시청자의 선호도는 여전히 높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중국 진출은 주로 포맷 수출 방식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 예능은 한국 예능 포맷을 표절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삼시세끼’는 ‘동경하던 삶(向往的生活)’으로, ‘윤식당’은 ‘중식당(中餐廳)’으로 이름만 바꾼 채 포맷을 그대로 활용했다. ‘나는 가수다’는 ‘가수’라고 제목을 고친 뒤 더 이상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다.

중국 예능 프로그램은 자체 제작 포맷의 성공을 위해서도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인기가 높은 ‘옷장을 부탁해(拜托了衣橱)’는 스타들이 출연하는 토크쇼다. 독특한 스타일의 디자이너들이 출연해 스타들의 옷장을 뒤져 공감과 폭소를 자아낸다.

한국의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포맷을 가져오면서 요리 대신 패션으로 주제를 바꾼 것이다. 중국 예능 프로그램은 이렇게 한국 포맷을 표절하거나 응용하는 방식으로 자체 포맷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대중문화는 이제 한류가 없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최근 중국 영화 ‘전랑(戰狼)2’의 흥행 성공은 중국 영화의 내수 시장이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정책 지원에 힘입어 중국 영화가 최강자로 등극한 것이다.

중국 영화 업계 실무자들은 여전히 한국과의 프로젝트를 희망하지만 당국의 제한 조치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 크레디트에 이름을 넣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중 합작을 추진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한령은 언제쯤 해제될 것인가? 중국 당국은 한한령을 부인해 왔다. 따라서 공식적인 해제령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안에 따라 한·중 합작이나 한국 콘텐트 또는 포맷 수입을 신청하면 눈감아 주는 식으로 서서히 상황이 완화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문제는 한한령이 해제된다고 해도 과연 중국 콘텐트 시장이 이전처럼 한류를 반가워하겠느냐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사이에 중국 콘텐트 시장이 한류 없이도 살아가는 방법을 충분히 익혀 왔기 때문이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는 양국이 영화를 공동 제작하고 TV 드라마 등 콘텐트의 공동 제작을 장려한다는 합의가 들어 있다. 우리는 최소한 이런 공식적인 합의를 바탕으로라도 중국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양국 관계 회복을 위해서라도 이제 할 말은 해야 한다.

관계가 회복되면 불씨가 되살아날 부분도 있을 것이다. 중국 영화의 경우 기술 처리 등 후반작업들은 여전히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한국과 중국의 대중문화 협력은 조정기에 진입해 이전처럼 전방위적 합작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 당국의 제한 조치와 중국 콘텐트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한 한류 콘텐트의 선택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선택이 가능하다. 우선 중국을 계속해 시장으로 볼 경우다.

이때는 첫째, 우리는 중국 콘텐트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고품질 콘텐트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둘째, 중국에 접근하면서 내부 시장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 대도시 중심의 콘텐트 시장을 확장해 2선 도시, 3선 도시로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셋째, 같은 중화문화권으로서 문화코드를 공유하는 대만과의 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대만 지렛대’ 효과다. 대만으로 우회하는 전략을 통해 대륙으로 다시 진입하는 구조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은 시장’이라는 공식을 깰 경우다. 이는 중국을 문화 콘텐트 생산국으로 인정하자는 발상이다. 우리가 중국 문화 콘텐트의 시장이 돼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은 한 가지다. 한국 내 시장에서 중국 콘텐트를 유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치이나 유쿠 같은 동영상 플랫폼은 물론이고 만다린 팝의 공연과 전시를 활성화할 오프라인 유통시스템도 필요해진다.

한류가 빠진 자리에 들어선 중국 콘텐트의 급성장 현상 앞에서 우리는 한류 콘텐트의 수준 향상과 동시에 중국 콘텐트의 유입을 준비하는 두 가지 방향의 노력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임대근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 영화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단법인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 중국 대중문화와 아시아 대중문화의 초국적 이동과 전파 등을 연구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중국 영화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임대근 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