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된장·고추장 모신 보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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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호 35면

성석제 소설

2013년 타슈켄트에서 만난 빅토르 김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이었다. 그의 조상은 20세기 초에 경상도 북쪽 고향 땅을 벗어나 만주 땅으로 이주했다. 만주에서의 정착 생활 기간은 가문에 잠시나마 햇빛이 비춰지던 시절로 많은 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마적 떼와 일본군의 침탈, 지주들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일거리가 있는 도시 주변으로 가야 했는데 가다 보니 그곳이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라 불리는 해삼위였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빅토르 김 #조상들 만주로 이주하면서도 #신주단지처럼 간장·고추장 애용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구소련 해체 후 역경에 처했지만 #나물·반찬 가공업 진출해 성공

기나긴 이주와 타관생활 중에도 빅토르 김 집안의 여인들은 간장, 고추장, 된장 단지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게 없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후손들이 제가 누구의 자손인지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면 신주단지가 있어야 했다.

“너희는 조선 사람이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잊지 마라.”

빅토르 김의 할아버지가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 때 기차에서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그것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남은 가족들의 삶에 긴요한 지표가 되었다. 그때 극동주의 고려인 총 3만6442가구 17만1781명이 총 124편의 열차를 타고 이주를 마쳤는데 이 중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1만6272가구 7만6525명이 배치되었다.

우즈베크 공화국에 내려진 고려인들은 소련에서 실시된 농업집단화 정책에 따라 협동농장에 배치되었다. 말이 농장이지 갈대가 우거진 황량한 땅이었다. 고려인들은 여기에 움막을 짓고 조선의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결국 벼농사에 성공했고 협동농장의 구성원들은 자급자족으로 별다른 부족함 없이 살았으며 학교와 병원까지 유치해 인근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들은 여전히 김치와 나물, 떡 같은 조선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발효음식을 많이 섭취하여 장내세균이 균형을 갖춰서인지 두뇌가 남달리 명석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고려인 3세, 4세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우즈베크 공화국 곳곳에 엘리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빅토르 김은 구 소련 시절 우즈베크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의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소련 내 다른 공화국에서 온 엘리트들과 함께 흑해 연안 휴양지에서 영재 연수 코스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창창한 미래를 의심치 않았고 언제 어떤 곳에 내던져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졌다. 실제로 그 뒤 십여년 간 그의 사회생활은 탄탄대로 그 자체였다. 그는 결혼을 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여쁜 자식을 낳았다.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 멋진 집을 배정받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가전제품, 가구, 자동차에서도 언제나 좋은 제품을 남달리 빨리 배정받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1989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즈베키스탄은 독립국가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된 상품과 투자가 밀려들었다. 고려인들의 삶에도 변화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사회에서 고려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공공연구기관이던 그의 직장에도 삭풍이 몰아쳤다. 직장에서 떨려나자 집도 비워줘야 했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화급했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집단농장도 현지인들이 점령군처럼 밀고 들어가 있어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그는 고뇌하고 분개했다. 하지만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사람은 아무리 슬프고 분해도 먹어야 산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밥을 먹고 나물반찬, 채소요리를 먹었다. 남은 음식은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채소요리와 나물반찬이 맛있다고 일부러 찾아와서 팔라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음식 솜씨가 좋은 부인을 믿고 시험적으로 채소를 많이 사서 나물과 반찬을 만들었다. 채소 그 자체는 특별한 맛이 없어도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양념하여 굽고 볶고 찌고 삶아 조리하면 특별한 맛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는 한때의 엘리트 연구원으로서의 체면은 집어던지고 시장 노점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나가 팔았다. 손님으로는 고려인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고려인들은 각자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되니까 굳이 돈을 주고 살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 무렵 한국에서 ‘사업 마인드’라고 부르던 감각이 있었다. 빅토르 김은 영재 연수 시절의 친구들과 맺어진 네트워크를 동원해 시장 조사에 나섰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는 구소련 해체 후 각 공화국의 좋은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고려인들이 많이 와서 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급했던 그들은 집에서 입고 먹던 것들을 시장에 내다팔았는데 그 중에서도 나물 반찬이 인기를 끌었다. 북방의 추운 지방 사람들은 식물성 음식을 잘 접하지 못했는데 간장 같은 발효식품으로 채소를 조리한 음식이 몸에, 두뇌에 좋다는 입소문까지 퍼지면서 수요가 급격히 발생하고 있었다.

빅토르 김은 이 사업에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인들에게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자금을 모았다. 채소가 많이 생산되는 남쪽 지역에서 식재료를 조달해서 인건비가 낮고 반찬을 만들기 좋은 환경을 가진 캄차카에서 조리, 가공을 한 나물과 반찬을 수요가 풍부한 모스크바 등지의 대도시에서 판매했다. 그를 따라 많은 고려인들이 식품가공업에 진출해서 성공을 거뒀다.

“한국 사람이 나물을 다루는 실력은 전 세계, 아니 우주 최고지요.”

그의 말에 나는 적극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석제 소설’은 성석제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험적 칼럼으로 4주마다 연재됩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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