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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힐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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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언제부터인가 ‘힐링’이라는 말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도처에 힐링이라는 기표가 떠다닌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아프다는 뜻이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면, 얼마나 상처가 깊으면 매사에 힐링을 외치겠는가. 힐링이라는 말은 ‘헬조선’이라는 말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잘 보여주는 단어다. 힐링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다급하고 절실한 현실이 되어 힐링과 관련된 ‘장사’도 성황이다. 바야흐로 힐링이 산업이 된 것이다. 힐링 여행, 힐링 패키지, 힐링 메뉴, 힐링 캠프, 힐링 연수, 힐링 콘서트, 힐링 뮤지컬, 힐링 문화체험, 힐링 드라마, 힐링 파크, 힐링 육아교실, 힐링 축제, 힐링 데이트, 힐링 인문학 등등 셀 수 없이 다양한 힐링 ‘상품’이 성행하고 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환자들이라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렇게 힐링이 구호가 되고, 상품이 되고, 산업이 되고 있을까.

진짜 치유는 상처와 정면으로 대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절망의 바닥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상처와의 건강한 싸움

상처와 힐링에도 개인적·사회적 차원이 있다. 사회 단위의 힐링은 대체로 요원하며 당장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사적인 차원에서 힐링을 찾는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가 힐링 상품의 사적인 소비로 해결될 리 만무하다. 힐링 상품은 소비의 대가로, ‘힐링 받았다’는 순간의 판타지를 선사한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힐링 받았다고 느낄 때, 소비자들은 치유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힐링의 환상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힐링 상품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부와 대면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마치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힐링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대신 회피하고 잊는 편을 택한다. 힐링 상품들은 대부분 일시적으로 이 ‘회피하기’와 ‘잊기’를 도와주는 마취제 혹은 진통제 같은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힐링 받은 여행, 힐링 받은 음식점, 힐링 받은 바닷가의 호텔 등 힐링 받은 그 모든 공간에서 돌아오는 순간, 다시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상처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질환은 계속적인 치유를 요구한다. 힐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힐링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온 나라가 힐링 문화, 힐링 산업, 힐링 소비로 가득 차게 되고, 사람들은 입만 열면 힐링 이야기를 한다. 문제는 그 어느 힐링 ‘시장’에도 진정한 힐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처를 대면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처는 달콤한 판타지로 피하거나 덮는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값싼 위로는 짧은 시간으로 끝날뿐더러 상처와 진정으로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치유는커녕) 질환을 더욱 깊게 만들 뿐이다. 진짜 치유는 상처와 정면으로 대면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처를 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며 그것의 원인을 고통스럽게 분석할 때 제대로 된 힐링이 시작된다. 물론 이 과정은 마치 쓴 약과도 같아서 괴롭고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는 한 상처의 원인은 보이지도 않고 실감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바닥까지 내려가 모든 것을 다 보았을 때, 되튀어 오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상처와의 건강한 싸움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질환에도 층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질환과 개인적 질환은 늘 맞물려 있고 뒤섞여 있어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사회적 질환은 개인의 사적 경험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힐링 산업은 개인적 차이를 무시하고 시스템의 문제 또한 건드리지 않는다. 그것은 무차별적이고 평준화된 전략으로, 치유가 아니라 (망각 요법을 통한) ‘치유로부터의 도피’를 조장한다. 그러니 시장에서 값싼 위로를 기대하며 부족한 시간과 재원을 낭비할 일이 아니다. 진정한 힐링은 환부와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외로운’ 시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