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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했던 골프장과 경마장의 동거, 지금은 아련한 추억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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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호 25면

[성호준의 세컨드샷] 로얄 리버풀, 뚝섬 골프장 공통점은

뚝섬 경마장 트랙 안에 있던 골프연습장. 캐디가 공을 놓아 주는 모습이 이채롭다. 뒤로는 경마장 관중석이 보인다. [중앙포토]

뚝섬 경마장 트랙 안에 있던 골프연습장. 캐디가 공을 놓아 주는 모습이 이채롭다. 뒤로는 경마장 관중석이 보인다. [중앙포토]

LPGA 투어 인디 위민 인 테크 챔피언십이 열리고 있는 미국 인디애나 주 브릭야드 크로싱 골프장은 자동차 경주장에 있다. 나스카 인디500 등 세계적 이벤트가 열리는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스 트랙이다.

브릭야드 크로싱의 14개 홀은 이 경주 트랙 바깥에, 4개 홀(7~10번 홀)은 안에 있다. 트랙 안과 바깥을 오가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불편하다. 그런데 왜 골프장을 레이스 트랙 안에 만들었을까.

전통적으로 골프장과 레이스 트랙은 관계가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1632년) 코스로 기네스북에 공인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근 머셀버러 올드 코스가 경마 트랙 안에 있다. 이 조그만 코스(파34, 전장 2874야드 9홀)에서 골프 규칙의 얼개가 잡혔다. 골프 홀의 지름(4.25인치, 108mm)도 이 코스에서 홀을 뚫던 파이프의 지름 때문에 굳어졌다.

골프와 경마장의 동거는 흔한 현상이었다. 디 오픈 챔피언십 개최지 중 하나인 로열 리버풀도 경마장 안에 있다가 인근 넓은 땅으로 옮겼다. 교통수단이 미미했을 때 도시 인근 평평한 땅은 골프와 경마에 모두 필요했다. 두 스포츠가 땅을 공유한 일종의 종합스포츠시설이었다.

한국에도 그랬다. 1968년 박정희는 뚝섬 경마장 트랙 안에 있던 채소밭을 활용하라면서 골프(연습)장을 짓도록 지시했다. 한국 골프 발전에 큰 도움이 된 이정표 중 하나였다. 연습장과 7개 홀 코스는 70년대 초 9개 홀로 확장됐다. 89년 경마장이 과천으로 떠나고 나서도 골프장은 남았다. 90년대 말 박세리 열풍이 불고 나서는 꽤 붐볐다. 짧고 조악했으나 그린피가 싸고 가까워서 골퍼들이 새벽 4시부터 줄을 섰다. 뚝섬에 서울숲 공원을 만들고 난지도에 대체 골프장을 짓기로 한 2004년 사라졌다.

오래된 골프장이 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현상이다. 인구가 늘고 개발 압력이 커지면서 금싸라기가 된 도시 땅을 골프장으로 쓰기는 쉽지 않다. 장비 발전으로 샷거리가 늘어나면서 좁고 짧은 코스는 버티기 어렵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니다. 경마 트랙 안에 있는 스코틀랜드 머셀버러 코스에서는 아직도 라운드를 할 수 있다. 감나무 드라이버 등 예전 장비를 빌릴 수도 있다. 4번 홀 옆에는 선술집이 있다. 19세기 말 명 골퍼 올드 톰 모리스가 이 곳에서 원정 경기를 하다가 동네 골퍼를 응원하는 갤러리들의 방해에 화가 나 경기를 그만 두고 술을 마신 곳이다. 거기서 150년 전 골퍼들을 상상하면서 한 잔 걸치는 느낌이 짜릿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자동차 경주장은 1929년 트랙 내 땅에 골프장을 만들었다. 경마가 자동차 경주로 바뀌었지만 트랙 내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똑같았다. 역시 코스가 좁아 위축되다가 1993년 인디애나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 피트 다이가 과거의 전통을 복원했다. 레이스 트랙 바닥에 쓰인 벽돌(브릭)을 해저드 벽 등에 재활용하는 등의 아이디어로 꽤 유명한 코스가 됐다. LPGA 투어뿐 아니라 PGA 투어, 챔피언스 투어까지 개최했다.

한국엔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뚝섬은 물론 최초의 골프장인 효창원, 청량리, 군자리 등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클럽하우스 자리, 1번 홀 티잉그라운드 자리 등 작은 기념비 몇 개라도 세워 뒀으면 한다. 그대로 뒀다간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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