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영장 사본으로 수집한 압수물 증거능력 없어"

중앙일보

입력

압수수색 영장 원본을 제시하지 않고 확보한 압수물은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국보법 위반' 전 경북대 교수 일부 무죄 #영장 원본 제시 않고 목록도 교부 안해 #"절차 어긴 증거 효력 불인정 첫 사례"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7일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안재구(84) 전 경북대 교수에 대한 상고심에서 일부 혐의를 무죄로 보고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안재구 전 경북대 교수(오른쪽 ). 왼쪽은 그의 아들인 안영민 『민족21』전 편집주간. [중앙포토]

안재구 전 경북대 교수(오른쪽 ). 왼쪽은 그의 아들인 안영민 『민족21』전 편집주간. [중앙포토]

검찰이 안 전 교수에게 적용한 혐의는 간첩, 찬양‧고무, 이적단체 구성 등이다. 검찰은 안 전 교수의 컴퓨터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으로부터 압수한 e메일 내역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증거물 중에는 안 전 교수가 북한 공작원에게 전달하려고 작성한 좌파 성향 단체 현황과 활동 동향이 담긴 보고서 등이 포함돼 있었다.

1심 법원은 안 전 교수의 혐의를 대부분 인정해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일부 찬양‧고무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안 전 교수의 e메일을 압수수색하면서 영장 원본을 제시하지 않았고, 압수물 목록도 교부하지 않아 증거물이 위법하게 수집됐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검찰은 압수수색영장을 팩스로 전송하고 일부 압수물은 우편으로 받았다.

검찰은 “압수수색영장 사본을 제시하더라도 압수수색 절차가 위법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절차상 하자에 해당한다고 보더라도 압수물의 증거능력을 배척할 정도로 위법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법원도 1심의 판단을 옳다고 봤다.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부장 강영수)는 “수사기관의 위법한 압수수색을 억제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대응책은 이를 통하여 수집한 증거는 물론 이를 기초로 획득한 2차적 증거를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고 의견을 밝혔다.

대법원도 “법관이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은 처분을 받는 자에게 반드시 제시되어야 하고, 압수물 목록을 작성해 소유자와 소지자 등에게 교부해야 한다”며 “기본적 인권 보장을 위해 마련된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된 증거는 원칙적으로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형사소송법 등에서 정한 압수수색영장 집행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한 증거는 위법해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을 대법원이 확인한 첫 사례다”고 설명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