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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핵이 통일을 막는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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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부른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행법칙은 역사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북핵 문제에도 통하는 원칙이다. 실제로 북한 핵폭탄의 숫자와 위력이 증가하면 살상력만 커지는 게 아니다. 이로써 게임의 룰이 바뀐다는 게 중요한 대목이다.

서독, 미사일 위협에 퍼싱II 도입 결단 #‘공포의 균형’ 달성 후 평화통일 이뤄

북핵 숫자부터 보자. 서너 개쯤이면 정보원을 통해 위치를 파악한 뒤 단숨에 깨버릴 수 있다. ‘예방적 타격(preventive strike)’이 가능하단 얘기다. 하지만 10개가 넘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깊은 땅굴에 숨겨진 핵폭탄을 모두 찾아내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작전에 돌입했다가 핵폭탄을 일소하지 못하면 수백만 명이 죽는 핵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미국이 군사행동에 못 나서는 근본 이유다. 북한은 최소 10개, 최대 60개의 핵무기를 지녔다고 한다.

북핵이 원자탄에서 수소폭탄으로 진화하면 위력만 커지지 않는다. 핵폭탄의 성격이 전술핵에서 전략핵으로 바뀐다. 300kt급 전술핵은 반경 30㎞ 내를 쓸어버리지만 수십, 수백 배 위력의 전략핵은 한국 정도는 나라 전체를 초토화한다. 적국이 전술핵만 있다면 국지적 피폭을 감수하고 선제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전략핵으로 무장했다면 보복 공격으로 온 나라가 파괴된다. 이제 미국도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이 처음은 아니다. 1964년 중국이 첫 핵실험을 앞뒀을 때도 미국은 펄펄 뛰었다. 1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싸웠던 중국이 핵무기를 갖게 된다는 건 용납 못할 사태였다. 심지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실험을 관두지 않으면 핵 개발지인 신장은 물론 베이징까지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어떻게 됐나. 중국은 원자탄·수소폭탄에 이어 인공위성까지 개발했고 이제는 핵보유국으로 공인받았다.

지금 북한은 수소폭탄에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거의 완성했다. 본토가 위협받게 된 미국으로선 ICBM 개발 중단을 약속받는 대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빅딜도 할 처지다. 우리로서는 북핵 위협 속에 전전긍긍하며 살 수밖에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국민의 목숨이 걸린 안보 문제에선 99.9%란 의미가 없다. 북의 공격을 받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털끝만큼이라도 존재한다면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공포의 균형 (balance of terror)’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독자적 핵 개발과 미군 전술핵 재배치라는 두 방안이 존재한다. 이 중 핵 개발은 국제사회의 반대가 격심할 게 분명한 만큼 전술핵 카드가 현실적이다.

청와대는 여기에 극력 반대한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 맞지 않을 뿐더러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없게 된다는 거다. 따라서 전술핵 도입 시 평화통일은 불가능해진다는 게 논리의 핵심이다.

과연 그럴까. 냉전이 최고조였던 75년, 소련은 동독 등 동구에 중거리탄도미사일 SS-20 650기를 기습 배치했다. 그러자 서독 슈미트 정부는 격렬한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미국으로부터 퍼싱II 미사일 96기를 들여와 배치한다. 공포의 균형을 이룬 셈이다.

이로써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난 서독은 마음 놓고 독자적인 동방정책을 펴 90년 통일을 이뤄낸다. 전술핵이 있어도 평화통일은 가능하다는 걸 역사가 웅변하는 것이다. 당시 서독에서 물결쳤던 구호는 이랬다. “지붕 위로 떨어지는 SS-20보다는 앞마당 퍼싱II가 낫다”고. 시간이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 법이다. 누가 뭐라든 북핵 공격보다 전술핵 재배치가 낫지 않은가.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