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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개인 청구권’ 이중잣대...90년대까지 인정 후 번복

중앙일보

입력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17일 발언에 항의했지만 정작 1990년대까지 국회 답변 등을 통해 이를 인정해오다 번복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일본 정부는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이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91년 외무성 조약국장, 한일 협정 두고 #“개인 청구권 소멸 안 돼” 국회서 답변 #94년엔 외무성 과장도 같은 해석 내려 #2000년부터 모든 청구권 완전 해결 주장

 20일 일본 국회 속기록에 따르면 91년 8월 27일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진 외교 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으로서, 이른바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외교 보호권은 특정 국가의 개인이 다른 나라의 위법 행위 등으로 손해를 봤을 경우 국가가 책임을 추궁하는 국제법적 권리다. 야나이 국장의 발언은 한일 청구권 협정 2조 1항에서 양국 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한 데 대한 해석으로, 국가 간 청구권과 개인 청구권은 별개라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정 전후에 작성한 외무성 내부 문서에서도 이 협정이 상대국 국내법상의 개인 청구권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1991년 8월 27일 야나이 슌지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 국회 답변 내용.[연합뉴스]

1991년 8월 27일 야나이 슌지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 국회 답변 내용.[연합뉴스]

 94년에는 일본 외무성 조약국 법규과장이 ‘외무성 조사 월보(月報)’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 등의 조약에서 규정하는 ‘국가가 국민의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개인이 갖는 국내법상의 개인 청구권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65년 이래 90년대까지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음을 일러주는 것인 만큼 전후 보상 문제에서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외무성은 한일 청구권 협정과 마찬가지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긴 옛 소련ㆍ일본 공동선언에 대해서도 같은 해석을 내렸다. 91년 3월 26일 참의원 내각위원회에서 다카시마 유슈(高島有終) 당시 외무대신 관방심의관은 "일소(日蘇) 공동선언에서 청구권 포기는 국가 자신의 청구권 및 국가가 자동적으로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외교보호권의 포기"라며 "일본 국민 개인이 소련이나 소련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일본인 피해자가 소련에 대한 청구권을 보유하고 있느냐"는 이토 마사토시(翫正敏)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2000년부터 입장을 바꿔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7일 미 캘리포니아주에서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전후 보상문제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한일 청구권 협정 등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 소송에서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일본 법원 판결 대다수는 일본 정부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007년 4월 히로시마(廣島) 수력발전소에서 강제 노동한 중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청구권의 포기가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의미는 아니다”고 했지만 청구권에 따른 재판상의 소송 권리가 상실됐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현재 한국 대법원에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3건의 손해보상 청구 소송이 계류 중이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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