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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일제 적폐 청산, 귀로 보는 무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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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30면

올해로 2회를 맞은 ‘늘푸른연극제’는 한국 연극사에 기여해 온 원로 연극인들을 기억하는 축제다. 지난해 첫 테이프를 끊은 김정옥·오태석·하유상·천승세 네 거장에 이어 올해는 배우 오현경·이호재, 연출가 김도훈, 작가 노경식 선생이 선정돼 그들의 역사적 대표작들을 통해 오늘의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원로들의 대표작 시리즈답게 오현경의 ‘봄날’, 김도훈의 ‘유리동물원’, 이호재의 ‘언덕을 넘어서 가자’ 등 가족과 사랑과 인생에 대해 고찰하는 이야기가 주류인 가운데, 유독 튀는 작품이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다.

연극 ‘반민특위’ #기간: 8월 11~20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문의: 02-3668-0007

노곡 노경식(79) 선생은 1930년대 유치진, 40년대 오영진·함세덕, 50년대 차범석·하유상에 이어 60년대 한국 정통 리얼리즘 희곡의 계보를 대표하는 극작가다. ‘철새’(1965) ‘정읍사’(1982) ‘서울가는 길’(1995) 등 한민족의 애환을 무대 언어로 승화시켜온 다양한 작품세계 중에서도 특히 현실참여적 성향이 강한데, 원로들의 축제에 굳이 ‘반민특위’를 들고나온 것도 의미심장하다.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실문제로 남아 있는 반민특위 사건을 광복절 즈음해 새삼 끄집어낸 것이다. 블랙리스트와 검열을 비롯한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정치극 부활의 당위성이 제기되는 지금, 연극계 어른으로서 뒷짐을 풀고 현실 참여적 작품으로 시대적 요구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연극 ‘반민특위’에는 독특한 사연이 있다.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 신작 지원 사업에 선정돼 초연됐지만, 당시 불미스런 사정으로 작가가 공연 감상조차 사양해 버린 후 줄곧 묻혀있던 작품이다. 작가가 이번 무대를 “진정한 초연”이라고 꼽는 이유다. 정부 수립 직후 설치됐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극우 세력의 방해 공작으로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혔다가 최근 영화 ‘암살’ 등 대중문화의 소재로 다뤄지며 적폐청산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기록극 형식의 무대는 완성도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고유한 연출적 요소나 무대 메커니즘이랄 것이 딱히 없어 김성노 연출의 말대로 “눈으로 보는 연극이 아니라 귀로 보는 연극”이다. 요즘 트렌드인 시각적 테크닉과는 담을 쌓은 채, 오직 이인철·김종구 등 원로급 배우들의 맛깔나는 연기 열전으로 1949년 당시 역사적 사실들이 나열된다. 일제 강점기 고등경찰 출신인 노덕술의 처벌을 둘러싼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과 이승만 대통령의 갈등, 서울시경이 날조한 남로당 프락치 사건, 친일파 이종형·김태석 등의 재판, 서울신문 정간 조치 등 일련의 사태가 해설자인 정 기자의 취재수첩을 따라 담담히 전개되고, 강건너 불구경하는 시민들의 대화가 종종 끼어든다.

흥미로운 건 반세기도 더 전에 일어난 일들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정치적 기반이 허약한 대통령이 반공·안보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극우세력을 결집하고, 반대 진영 타도를 위해 터무니없는 사건을 조작해 관제 데모를 지원하거나 언론을 탄압하는 모습들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들이다. 정치권력만 그런 건 아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는 부역자들로 시작해 반민특위 법정의 시위꾼들, 관제 데모대 등으로 때마다 시류에 휩쓸리는 이름없는 군중의 한결같은 모습이 더 섬뜩하다.

시종 건조하게 전개되던 무대는 ‘6.6 습격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속절없이 해산되는 비극적 파탄에 이르러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천장에서 처참한 형상의 조형물이 한꺼번에 내려오며 해설자인 정 기자가 등장해 반민특위 특경대에 가해진 일제 강점기나 다름없는 고문의 참상을 고발하며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다. 일제보다 더 악랄했던 친일세력의 잔재를 지금껏 청산하지 못한 것이야 말로 식민의 굴욕보다 부끄러운 우리 현대사가 아니냐고 외치는 듯하다.

“아가야, 너는 아빠 같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지 마라.” 정 기자의 만삭 아내가 곧 태어날 아이에게 보내는 염원이 이 무대의 마지막 대사다. 지금 60대 중반을 훌쩍 넘겼을 그 아이는 과연 아버지보다 나은 세상을 살았을까.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광복 후 어린이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해 최초로 창작됐다는 국민동요가 거듭 울려퍼지며 막이 내린다.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란 모든 국민을 향한 노 작가의 푸념 아닐까. 좋은 세상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한국연극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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