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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나를 기대해준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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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영혼까지 녹일 것 같은 이 더위를 영화관에서 피해 보려는 이들에게 ‘내 사랑’이란 영화를 권하고 싶다. 개봉 3주 만에 2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작은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이 영화에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시원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촌 마을 가난한 생선 장수의 아내로 살아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을 잔뜩 남겼던 캐나다의 민속 화가 모드 루이스(1903~1970)의 일생을 잔잔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원제는 ‘모드(Maudie)’. 소아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등이 굽고 다리를 절었던 모드(샐리 호킨스)는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다른 가족들에게서 거추장스러운 짐 취급을 받는다. 서른넷의 나이에 자립을 결심하고 열 살 연상의 생선 장수 에버렛 루이스(에단 호크)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자신을 무시하고 폭언을 쏟아내는 거친 이 남자를 ‘내 사랑’으로 만들어 가며, 전기도 보일러도 없는 작은 집을 그림으로 채우기 시작하는 모드. 몸이 불편해 자주 외출할 수 없었던 그가 주로 그린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꽃과 나무, 고양이와 닭, 그리고 바다와 산등성이 등이었다.

모드 루이스의 그림 ‘검은 고양이 셋 (Three Black Cats)’.

모드 루이스의 그림 ‘검은 고양이 셋 (Three Black Cats)’.

한국어판 제목은 “헌 양말 한 켤레 같았던” 이 부부의 사랑에 집중하라 요구하지만, 정작 모드의 삶을 빛나게 만든 것은 남편과의 사랑만은 아니었다. 생선 배달 문제로 그들의 집을 찾았던 뉴요커 샌드라(캐리 매쳇)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저 닭, 당신이 그린 거예요?”라고 묻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샌드라는 생선 판매 영수증용으로 건넨 엽서에 그려진 모드의 그림을 보고 “돈을 낼 테니 더 많은 그림을 그려 줘요. 기대가 커요”라고도 말해 준다. “노력해 볼게요”라고 답한 모드가 뒤돌아서며 “내 카드가 맘에 드나 봐요”라고 에버렛에게 속삭인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웃음과 함께.

삶의 모든 조건이 절망적이라 느껴질 때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모드의 내면에 감춰진 진솔한 아름다움과 꾸밈 없는 색채를 알아봐 준 샌드라가 없었다면 모드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나를 나로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은 나를 발견해 주고, 기대한다고 말해 주는 누군가의 한마디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