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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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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호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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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형편없이 조악할 뿐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고통에 불과한 것 #다만 ‘한번 더’ 놀이를 즐기자 #그것만이 운명을 거스르는 방법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고통에 불과하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아득한 무의미로 전락한다. 필부라면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자라 할지라도 ‘가만한 당신’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비참한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자, 영웅 오이디푸스조차 노년에 이르러서는 절망을 깨달음으로 받는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되도록 빨리 왔던 곳으로 가는 게 그다음으로 좋은 일이라오. 경박하고 어리석은 청춘이 지나면 누가 고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누가 노고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오? 시기, 파쟁, 불화, 전투와 살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난받는 노년이 그의 몫으로 덧붙여지지요.”

인간의 삶이란 보잘것없는 것이다. 경박하고 어리석은 청년, 고생과 노고에 속박된 장년, 조롱당하고 비난받는 노년으로 이루어진, 허무한 시간의 계열체일 뿐이다. 기를 쓰며 애써도 ‘안 되겠는 걸’ 마감하는 게 고작이다. 진실이란 이토록 냉혹하고,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일까. ‘또 다른’ 인생은 없을까. 현세의 질서대로 사는 자들의 운명은 빤하다. 죽음이 오고, 망각이 덮치고, 무(無)로 돌아간다. 인생은 무상(無常)이다. 지금 이 세계의 문법을 거부하고 무의미가 생산되는 경로를 바꾸지 않으면, 당연히 결말도 변하지 않는다. 이 결말은 바꿀 수 없는 걸까. 아무도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고도를 기다리는 자’들은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오랫동안 속으로 타일러 왔지.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싸움을 다시 계속해 왔단 말이야.” 사뮈엘 베케트는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와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사이에 인간을 걸쳐둔다.

인생에서 ‘새로운’ 좌절은 불가능하다. 삶은 본래 좌절이니 말이다. 힘이 남았을 땐 ‘한 번 더’ 해보는 것이고, 아닐 땐 예정된 미끄럼틀을 내려가는 것이다. 셰에라자드 왕비는 세상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흥미 있는 이야기로 만든다. 하지만 보상은 고작 하루의 목숨을 벌어 저녁이 되면 또다시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 일뿐이다. 이야기꾼으로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이 ‘놀이’를 한없이 반복하는 일이다.

천일야화야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실제 삶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길은 하나. ‘한 번 더’ 이 놀이를 신나게, 죽음이 올 때까지 즐기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 일을 가장 잘했던 사람이 스페인에 있었다. 기사 이야기를 즐기다 못해서 세상 자체를 기사 이야기로 만들려 했던 사람, 돈키호테 말이다. 편력기사 돈키호테의 세계에는 공주도 있어야 하고, 성도 있어야 하고, 거인도 있어야 하고, 악당도 있어야 한다. 물론 실제의 ‘초라한 현실’에 이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절망을 모른다. 현실의 질서를 좇아 더러운 삶을 견디는 대신, 그는 자기 모험에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현실에다 발명한 쪽을 택한다. 망상의 언어를 세상 모든 것에 덮씌운 후, 거기에 맞추어 살아버린다. 그러고는 ‘있는 그대로’만 세상을 인지하는 ‘이성의 환자’인 산초한테 거세게 일갈한다.

“네가 나와 더불어 편력한 지도 꽤나 되었건만 겉으로 보기에는 편력 기사들이 하는 모든 일이 망상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친 듯해 보여도 사실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돈키호테는 미친 게 아니다. 자신이 ‘망상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친 듯해 보’인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질서에 집착하고, 이 세상을 자신이 바라는 이상대로 창조해 버린다. 진부하고 식상하며 결과가 정해진 모두의 언어를 거부하고 ‘사적인 언어’를 써서 이 세상을 해방한다. 돈키호테는 자유의 완벽한 상징이다.

돈키호테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묘비명이 그의 일생을 증언한다. “용기가 하늘을 찌른 강인한 이달고 이곳에 잠드노라.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이기지 못했음을 깨닫노라. 그는 온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니 세상은 그가 무서워 떨었노라. 그런 시절 그의 운명은 그가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었음을 보증하노라.”

미쳐서 살다 제정신으로 죽었다고 한다. 세상을 희롱했던 이 위대한 기사 역시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 우리 모두와 ‘똑같이’ 제정신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제대로 놀아본 사람이었기에 돈키호테는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운명이 이미 정해졌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한 번 더’ 즐겁게, 미칠 정도로, 확실히 놀아라. 그 대가는 불멸일지니.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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