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국회] '공정성 회복'으로 사회적 불신 극복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늘의 우리 사회는 불신감이 곳곳에 만연되어 있다.

저마다 배타의 두꺼운 갑옷을 입고, 서로를 경계하면서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꺼려한다.

적의 적은 동지란 해괴한 논리가 환영 받고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었이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난무하며

저마다 철옹성을 쌓아, '사람과 사람사이의 왕래나 개 닭의 울음소리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한다는 것.

이 얼마나 큰 불행이며 이 얼마나 큰 비참함인가?

옛날 노나라의 성인이 병(兵) 식(食) 신(信) 셋 중에서 믿음을 국가존립의

제1순위에 둔 것은 불신이 망국으로 연결됨을 무수히 봤기 때문이며

오늘날의 극좌나 극우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불신이 국가의 가장 큰 우환임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확실히 불신은 암적 존재 같아서 이를 그냥 방치할 경우

우리 사회의 기반은 근본에서부터 와해되어 급기야는 상호논쟁의 둔덕인

토론과 비판의 마당까지도 없어지는 상황을 맞을 것이다.

분명히 불신은 우리 사회의 기류를 바꿔놓아 이를 그냥 방관할 경우

개인간은 사적 투쟁이 격화되고, 집단이 집단을 치는 상태에 돌입할 것이다..

불신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의식개혁이나

운동보다도 우선해야하며, 지엽적인 문제의 제기나 정책 실패의 추궁보다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럼 모든 부조리의 원천인 불신이 팽배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작금의 이 사회 이 시대를 이끄는 뚜렷한 규범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유교라는 가치기준이 있어 왕을 비롯한 일반백성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했지만 오늘날은 그것마저 없어져 버렸고.

합리적인 서구문명의 수용에도 실패하여 사고의 기준이 되고 행위의 표준이 되는

정신적 지주가 없는 것이 근본요인이라 할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극심한 가치체계의 혼란과 moral의 붕괴는 각자의 기준이 준칙이 되어

기회주의자가 양산되면서 공론이나 공의(公議)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백안시당하고 현재의 물리적 힘이나 목전의 이익에만 탐닉하는

“흔들리는 인간”만 대면하는 것이다.

이러니 불신이 핵폭발처럼 불어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이 나라 지도자연(然)하는 사람들의 저급함과

행정기관의 요령주의가 그것이라 본다.

원래 민의는 상향식이고 모범은 하향식인데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식언을 거듭하고 마음 씀이 밴댕이 같아서 국민의 정치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불러왔다.

정책의 일관성 지속성 통일성을 견지해야 할 정부는 고려공사 3일(高麗公事三日)

식의 행정을 펼치다보니 처음부터 다시 하는 비능률에다 처음의 결정을 믿었던

손해하며 언제 또 변할지 모르는 불안감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책임이 전가되고 책임을 회피하다 보니

임기응변은 능사가 되고 미봉책은 즐겨하는 것이며 형식주의 편의주의

적당주의는 삼각편대를 이뤄 행정에 대한 불신만 쌓이게 한다.

이렇게 불신은 사회구조상의 결함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고 사람이 잘못 대응

함으로써 야기되기도 한다.

불신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며

눈덩이가 눈사태로 번지는 것들의 상징으로서 그 번식력과 파괴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가히 공공의 적 리스트의 첫번째에 들 것이다.

불신의 제거와 추방 없이는 “깨끗한 사회” “명랑한 사회” “공정한 사회”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이 난적(難敵)을 패퇴시키는 방법은 있으니

그것이 사회 공동선(共同善)의 하나인 사회적공정력(社會的公定力)의 확립일 것이다.

시회적공정력이라는 것은 일단 한 번 성립된 약속이나 규칙은 당사자의 합의나

동의 그리고 공공의 이익 때문에 무효로 될 때까지는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정의(情誼)관계든 계약관계든 상대방의 장래 행동을 예견하고

그 예견 속에서 관계를 가지게 마련인데 갑자기 약속을 어기거나 규칙을 깨뜨리면

신뢰관계의 기반은 위협받는다.

이래가지고는 사회생활은 전전긍긍하게 되고,

앉아도 불안하며 숨을 쉬어도 가쁘기만 하다.

이때 무질서와 혼란을 바로잡고 당연한 것을 다시 가까이 둠으로써

공정성(公定性)이 그 가치와 규범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변경될 때까지는 일단 정한 것은 공신력(公信力)을 부여하여

불가변(不可變) 불가경(不可更)하는 것.

장래 누구든지 그 약속을 지키면 불리하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한 번 정한 것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

즉 하늘이 두 쪽 나도 한 번 정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이다.

“약속은 지켜야한다”는 것에 무슨 이유를 붙이고 무슨 의문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우리 인간 존재의 토대이며 당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홀대 당하고 천대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개개의 정의보다 전체의 정의(안정성)을 강조한

라드부루흐(G Radbruch)의 입장일 것이며.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정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무분별한 사면권이나 봐주기식 행정은 지양돼야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공정성이 사회규범으로 작용할 때

그 사회는 rule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질 수가 있고

,일탈과 방종이 제어되며,

창의성과 자율정신은 그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시세에 밝은 사람. 소위 대세주의자(大勢主義者)가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분장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 있고

약속이나 관행이나 규칙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취급되는 것을 종종 본다.

온갖 탈법 불법 위법 편법 무법이 이런 생각의 연장선일 것이다.

신의를 손바닥 뒤집듯 하고 지조를 저자거리의 물건 파는 듯이 한 사람들에게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고

당국자간에 조율이 아니되고 이 사정 저 사정에 정책이 춤을 추면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미아같은 나라나 국민이 된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자기행동에 책임을 질 때 그만큼 우리사회는

무게가 더 나갈 것이며, 정부가 좌로 우로 흔들리지 않을때 정책은 지지를 받아

규범은 활민(活民)의 기술이 되고 시책은 활국(活國)의 묘리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에 한 아가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에서

익사한 미생(尾生)을 본받으라거나 한 번 승낙이 천금에 버금간다는

계포(季怖)를 닮으라거나 일사불란해야 한다는 것은 꼭 아니다.

사회의 공정성(公定性)은 질서정연한 정렬미(整列美)로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우후죽순의 역동미(力動美)가 가능하게끔 우리를 받쳐준다.

공정력은 정체성(identity)과 짝을 이루어 개인이 공정성을 추종할 때

자기의 동일성을 실현할 수가 있고,

정부가 공정성을 유지할 때 국민의 호응과 참여는 증대된다.

공정력이 사회에 살아있어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부터 국가의 세세한

부문까지 영향력이 미칠 때 사회는 공정(公正)하고 공명(公明)해 질 것이다.

앞으로 사회적 공정력이 그간 실추된 정부의 신뢰를 회복되게 하고

예측가능한 사회를 만드는데 점청(點晴)의 역할을 하였으면 한다.[디지털국회 김성춘]

(이 글은 인터넷 중앙일보에 게시된 회원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앙일보의 논조와는 무관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