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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마’ 만들어 클래식 쉽게 풀어내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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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페라마 장르를 만든 바리톤 정경씨가 두 팔을 펼치며 열창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오페라마 장르를 만든 바리톤 정경씨가 두 팔을 펼치며 열창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서울 대학로의 한 공연장. 230석이 꽉 찬 이곳에 바리톤 정경(37)씨가 ‘인문학 강의’를 펼쳤다. 어릴 적 겪은 아버지의 학대, 청력 장애 등 베토벤의 비화(秘話)를 ‘헬조선’으로 일컫는 요즘 한국 사회와 비유했다. 그런 다음 정씨는 베토벤의 가곡 ‘그대를 사랑해(Ich liebe dich)’의 서정적인 멜로디를 노래했다. 약 2분간의 연주 후 그는 다음 노래인 슈베르트 곡의 설명을 이어갔다.

대학로서 공연하는 성악가 정경 #클래식 엄숙해 관객이 낄 틈 없어 #이해하기 쉽게 에피소드로 해석 #제주 해녀 사연 담은 노래 제작 #트럼프 취임 축가 요청받기도 #연말에 베를린필과 협연 계획

관객들은 "가곡과 기악 위주의 클래식 공연은 이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다”며 흥미로워했다.

정씨는 클래식에 인문학이 가미된 독특한 공연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공연명은 ‘정신나간 작곡가와 키스하다’. 지난 4월부터 격주 월요일 저녁에 열린다. 장르도 ‘오페라마’로 특이하다. 오페라와 드라마의 합성어로 정씨가 직접 지었다. 그는 “대중이 클래식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클래식과 관련 에피소드를 서술식으로 풀어낸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서 독창회를 가진 실력파 성악가 정씨가 유명 공연장 대신 연극 1번지 대학로 무대에 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래식 공연은 엄숙한 분위기 탓에 관객이 낄 틈이 없어요. 성악가·연주자의 노래를 감상만 하니 클래식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죠. 하지만 클래식은 매우 대중적 음악이랍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도 1980~90년대 자동차 후진음으로 쓰일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지요.”

184㎝·90kg 체격에 성량이 풍부한 정씨는 모짜르트·베토벤·슈베르트의 가곡을 주로 부른다. 국민대 예술대 교수를 겸직해 강의력도 수준급이다. 그는 “제 공연을 보고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된 몇몇 관객은 거꾸로 오페라 공연을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낙점을 받은 일화도 소개했다.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 인수위원회로부터 취임식 축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이 알려져서다. “셀린 디온, 엘튼 존 등 해외 유명 가수가 축가를 잇따라 거부하는 상황이었죠. 인수위원회 한국인 직원이 ‘축가를 불러달라’며 제게 신분증을 요청했어요. 비록 성사되진 않았지만 제 실력을 미국에서 알아봐줬단 생각에 기뻤죠.”

비(非)예고 출신인 정씨는 학창 시절 모범생과 거리가 멀었다. 음대 진학을 준비한 건 “실기 몇 번이면 입학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재수 끝에 경희대 성악과에 입학해 음악인의 꿈을 키운 정씨는 가수 아이비, 그룹 넥스트 출신 기타리스트 김세황과 퓨전 공연으로 이름을 알렸다. 최근엔 공익적 공연도 열었다.

“지난해 초 방문한 제주 해녀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해녀 분들이 일제와 맞서 싸운 것을 알게 됐어요. 대중에 잘 안 알려졌단 생각에 이들의 사연을 ‘바다를 담은 소녀’란 노래로 만들어 국내외서 불렀죠. 제주해녀의 지난해 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한듯 해 기뻤답니다.”

정씨는 올해 말쯤 독일 베를린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협연을 제안할 계획이다. ‘정신나간 작곡가와 키스하다’를 현지 버전으로 공연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성악가들은 외국 클래식 노래를 ‘더 잘 부르는데’ 관심이 많아요. 독일에서의 제 목표는 원곡보다 더 진중하고 재밌는 음악을 들려주는 겁니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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