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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잊혔던 이병령 끄집어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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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인명 피해를 부른 세계의 원전 사고는 미국의 스리마일(1979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86년), 일본의 후쿠시마(2011년) 발전소였다. 이들 나라는 탈원전을 선언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 안전성이 강화된 새로운 원전 정책으로 복귀했다. 미국은 2010년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31년 만에 신규 원전을 허가하면서 “안전 문제는 과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지금 원전에 투자하지 않으면 기술을 수입해야 할 처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기조는 트럼프 정부에서 더 강화됐다.

한국형 원전 개발 DJ·노무현 사람 #문 대통령, 이 사람 얘기 들었으면

최근 일본 도쿄전력홀딩스의 가와무라 다카시 회장은 인터뷰에서 “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UAE)도 원전을 신설하고 있다. 원자력을 버리면 일본 경제가 쇠퇴한다”고 했다. 사고를 실제로 경험한 당사국들도 원전 건설을 다시 시작했는데 우리 정부는 단지 사고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뚝딱 중단시켰으니 단순함과 과격성이 놀라울 뿐이다.

물론 100만 분의 1의 사고 가능성을 걱정하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동시에 신고리 5, 6호기 건설이 영구 중단될 경우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760여 개 업체 5만 명이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재앙적 현실도 살펴야 하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일이다. 문제는 대통령 주변에 “방사능 때문에 북태평양산 고등어는 300년 동안 먹어선 안 된다”는 극단적 환경주의자나 “지역 주민이 수용할 수 있게 일단 건설 중단부터 해놓고 보자”라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득실댄다는 점이다. 이럴 때 문 대통령이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한 이병령(70) 같은 사람을 불러 얘기를 들으면 균형 잡힌 시야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잊혔던 그를 끄집어내는 이유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원전사업 본부장이었던 이병령은 기술자립의 열정과 미국과 맞짱뜨는 용기, 끝을 보고야 마는 근성과 조직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리더십으로 90년대 초반 한국형 원전 설계에 성공했다. 한국형 원전은 94년 1차 핵위기 시 북한 설치 모델을 선택할 때 러시아형,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제품을 제침으로써 일약 원전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이병령 팀이 디자인한 원전은 98, 99년 울진 3, 4호기 준공으로 완성을 보게 된다. 이 시스템이 계속 업그레이드돼 도쿄전력 회장이 위기감을 토로한 2009년의 20조원짜리 UAE 한국형 원전 수출로 이어졌다.

이병령이 안전·가격·공기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을 개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스리마일 사고로 자국의 원전기술 보호에 소홀히 한 틈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걱정한 대로 미국 원전기술의 본산인 웨스팅하우스는 일본 손에 넘어갔다. 이병령은 한국형 원전을 개발하면서 원전 마피아 세력의 방해를 받았다. 그들의 대미 굴종적 자세와 도전·헌신을 기피하는 현상유지적 관료주의에 발목이 잡혔다고 한다(『무궁화꽃을 꺾는 사람들』2011년). 이병령은 90년대 가장 유명한 과학기술자 중 한 명이었다. 96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총재와 ‘꼬마 민주당’의 노무현 최고위원이 각각 이병령을 만나 자기 당 후보로 출마시키려는 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그의 자주적 혁신정신이 진보적인 두 정치 지도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을 간직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주변을 에워싼 환경 극단주의자들의 허실을 요모조모 지적해 줄 몇 안 되는 원전 전문가가 이병령이다.

◆이병령 약력=충남 공주 출생, 서울고·서울공대·KAIST 박사, 한국원자력연구원 대북원전지원팀장, 대전 유성구청장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