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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 모이면 국회 문이 열린다…촛불 대신 스마트폰을 든 시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기를 한 명 기르는 워킹맘인 저는 최근에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했는데, 이게 웬걸. 근로기준법 연차 휴가 기준에 따라 1년 만근하지 않은 임직원은 연차가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맞닥뜨렸습니다. …아기가 아파 어린이집에 가지 못할 때, 아기를 맡길 사람도 없는데 낼 수 있는 휴가도 없는, 이보다 더 막막한 상황이 어디에 있을까요?"

신입 사원의 연차(유급휴가)는 2년 간 15일로 제한돼있다. [일러스트=김회룡]

신입 사원의 연차(유급휴가)는 2년 간 15일로 제한돼있다. [일러스트=김회룡]

시작은 워킹맘 A씨의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현행법은 입사 첫해 유급휴가를 사용하면, 이듬해 연차휴가 15일에서 첫해 사용한 날만큼 빼도록 돼 있다. A씨는 신입사원의 유급휴가를 2년간 15일로 제한하는 근로기준법 제60조 3항의 수정을 건의했다.

일상 속 불편함, 입법 추진하는 시민들 #시민 제안 법안 4개 국회에 이미 발의

"휴가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그렇게 휴가쓰면 어떡하냐는 소리를 들었다" "입사 후 2~3개월에 한번 연차를 썼는데, 다른팀은 쓰지도 못하는 거라며 부장님이 생색을 냈다. 2년차가 되고 보니 연차가 6일밖에 없더라" "로펌에서 일하는데 이 업계는 연차 월차 개념다. 법을 전공한 사람들이 근로기준법조차 안 지키는 아이러니한 상황" 등 여름 휴가는 커녕, 1~2일짜리 연차도 눈치가 보여 쓸 수 없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1832명이 A씨의 입법 제안에 지지 버튼을 눌렀다. 지난해 오픈한 시민입법 플랫폼 '국회톡톡'에서 벌어진 작은 변화였다.

국회톡톡 운영진은 '지지자 1000명을 넘기면 관련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에게 제안을 전달한다는 방침에 따라 환경노동위원회 국회의원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한 의원은 지난 1월 입사 1년차에 12일, 2년차에는 15일의 유급휴가를 보장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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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서 외출하면 화장실을 못 가겠어요."

부산 수영구 광안리해수욕장 인근 수영구 생활문화센터 지하 1층 공중화장실 복도에 설치된 몰카 범죄 경고 조형물. 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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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국내 한 워터파크 여성 샤워실에 몰카를 설치해 찍은 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됐다. 지난 4월에는 걸그룹 팬 사인회에서 안경 몰카를 쓰고 사인을 받으러 온 남성 팬이 현장에서 발각되기도 했다. 디지털 성폭력 대항 단체인 '디지털 성폭력 아웃(DSO)'은 몰카 구매자에 대한 관리시스템을 도입하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몰카를 소지하는 것을 불법으로 해달라고 제안했다. 글이 올라온 지 2시간 반 만에 참여자가 1000명을 넘겼다.

입법 참여를 제안받은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지난 11일 '몰카예방법'을 대표 발의했다. 진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는 지방자치단체가 공중화장실 등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돼 있는지 주 1회 이상 점검하고 몰카 상습법을 가중 처벌하는 내용이 담겼다. 시민 제안대로 몰카 소지를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도 준비되고 있다.

"취업 준비생의 절박함을 이용하지 마세요." 

청년 11명이 모여 결성한 '청년정치크루'는 '취업준비생 보호법'을 제안했다. [일러스트=강일구]

청년 11명이 모여 결성한 '청년정치크루'는 '취업준비생 보호법'을 제안했다. [일러스트=강일구]

이동수(29)씨는 지난해 '청년정치크루'를 결성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지인 10명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조직이다. 지지하는 정당은 다르지만 선거 때만 반짝 나오는 청년 정책, 일자리 창출에만 집착하는 디테일 없는 정책에 한계를 공감했다.

이들은 지난 3월 '취업준비생 보호법'을 국회톡톡에 제안했다. 채용과정에서 실무 평가를 빌미로 영업행위를 강요하지 못하게 막고 채용 시 연봉 정보를 공개하는 등의 내용이다. 신보라 자유한국당 의원과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관련 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법안 초안은 제안자인 청년정치크루와 함께 검토했다.

이들의 다음 타깃은 예비군 동원훈련이다. 이씨는 "대학생은 1년에 하루, 해외 거주자는 면제받는 동원훈련을 일반인이나 고졸취업자는 5일 정도 간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차라리 하루 집중적으로 훈련받으면 되지 않겠느냐"며 예비군 동원훈련을 폐지하거나 줄일 방법을 찾고 있다.

"매번 광장에서 촛불을 들 수는 없잖아요?" 

'국회톡톡' 사이트에서 시민이 제안한 법안이 1000명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국회 관련 상임위 의원들에게 안내된다. 어린이 병원비를 국가가 보장해달라는 제안은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국회톡톡 사이트 갭처]

'국회톡톡' 사이트에서 시민이 제안한 법안이 1000명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국회 관련 상임위 의원들에게 안내된다. 어린이 병원비를 국가가 보장해달라는 제안은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국회톡톡 사이트 갭처]

국회톡톡은 정치 스타트업 '와글'과 온라인 개발자 조합 '빠띠', 싱크탱크 '더미래연구소'가 만든 사이트다. 이 사이트에서 시민이 작성한 제안은 필터링 없이 그대로 공개된다. 근거가 희박하거나 현실성이 없어도 운영자가 수정해주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례, 객관적인 통계, 관련 기사와 대안 등을 직접 준비해 다른 시민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와글의 오진아 매니저는 "지난 겨울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이 100만, 200만으로 늘어나면서 미온적이었던 정당들이 입장을 바꿨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적 효능감을 느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바쁜데 사안이 생길 때마다 모두가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 수는 없기에 시민입법 플랫폼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빠띠도 "민주주의란 원래 시민들이 나라의 주인, 최고기관이어야 하는데,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등 제한된 사람들만 참여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국회톡톡 개발에 참여했다.

국회톡톡은 오는 9월 정기국회 때 발의된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법안 제안자들과 회의 영상 모니터링, 상임위 회의록 공람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현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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