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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까지 쫓아가 히치콕에게 묻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7월 13~23일)가 열렸다. 영화제를 찾은 수많은 게스트 가운데 magazine M이 다섯 감독을 만났다. 특별전의 주인공으로 영화제를 찾은 스페인 거장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과 낯설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네 감독들. 그들과의 대화를 풀어놓는다.

‘78/52’ 알렉산더 O 필립 감독

다큐멘터리 감독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스위스 출신 알렉산더 O 필립(45) 감독은 걸작 ‘싸이코’(1960,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속 샤워 장면만 가지고, 1시간 31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무척 집요하고 재미난 감독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78/52’이 뭔가.  
“‘싸이코’ 샤워 시퀀스가 78번의 카메라 셋업과 52개의 숏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에 대한 오마주로 제목을 지었다. 엉뚱하지만 타이틀의 슬래시(/)가 샤워 시퀀스에서 피해자를 향해 휘두르던 칼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 마음에 들었다(웃음).”

―왜 샤워 시퀀스에 주목했나.  
“‘싸이코’의 명장면이자,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2분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영화들은 숨겨진 폭탄을 관객에게 슬쩍 보여주는 방식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반면 ‘싸이코’는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서스펜스를 만들고, 그것을 샤워 장면에서 폭발시킨다. 샤워 시퀀스가 왜 대단하며, 얼마나 많은 영화인에게 영감을 가져다줬는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속속들이 보여주고 싶었다.”

―45명의 유명 영화인이 인터뷰이로 나온다.  
“워낙 히치콕 감독을 좋아하고, 샤워 시퀀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영화인이 많아 섭외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월터 머치다. 2시간 30분 동안 장면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는데, 과연 세계 최고의 영화 편집자다웠다.”

―흑백의 컬러, 으스스한 현악 등 의도적으로 원작 ‘싸이코’의 설정을 취한 듯한데.  
“원작의 거울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영화처럼 모텔 안에서 진행했다. ‘싸이코’에서 45분쯤 샤워 장면이 나오는데, 이 영화도 40분까지는 당시 전후 사정만 언급하고, 의도적으로 샤워 장면을 감췄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처럼, 관객이 뭔가 일이 벌어질 듯한 긴장감을 품고 이 영화를 보길 바랐다.”

―살해 장면의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멜론을 가지고 실험하는 장면이 신기하더라.  
“대개 사람을 칼로 찌르는 소리는 두툼하게 썬 육류를 활용해 만든다. 유독 히치콕은 멕시코에서 나는 카사바멜론을 고집했다. 이유가 궁금해, 27개 종류의 멜론 300개를 준비해 칼로 하나씩 찔러 봤다. 확실히 보다 진하고 물컹한 소리가 나긴 하더라. 덕분에 일주일동안 모든 스태프가 멜론을 먹었다(웃음).”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인터뷰이는 의외로 여자 주인공 자넷 리의 대역이었던 말리 렌프로(샤워 시퀀스에서 자넷 리를 대신해 누드 연기를 했다)다.  
“거의 50년 넘게 잊힌 인물이지만 샤워 시퀀스와 ‘78/52’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대중은 리만 기억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렌프로였다.”

―히치콕이 살아있다면 무엇을 물어보고 싶나.  
“하아, 궁금한 게 너무 많다. 그 살벌한 검열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샤워 시퀀스를 완성시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검열관들을 설득시켰는지, 검열관의 방에서 대체 무슨 제안을 했던 건지 너무 궁금하다. 왜 카사바멜론을 택했는지도 꼭 물어보고 싶다(웃음).”

너무나 집요하고 디테일한 '78/52'

그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관한 수많은 서적과 다큐멘터리가 있었지만, 이보다 디테일하게 ‘싸이코’의 샤워 시퀀스를 탐구하는 작품은 없었다. 알렉산더 O 필립 감독은 샤워 장면의 대역이었던 말리 렌프로를 비롯해 길예르모 델 토로, 일라이 로스, 일라이저 우드, 믹 개리스, 제이미 리 커티스 등 많은 영화인의 입을 빌려 샤워 시퀀스를 재구성한다.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촬영 각도와 카메라 워크, 편집 기술, 솔 바스의 스토리보드, 절규하는 바이올린, 음향 효과 등으로 화제를 바꿔가며, 집요히 장면을 파고든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 ‘대부3’(1990) 등을 편집했던 월터 머치가 숏 바이 숏으로 시퀀스를 해부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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