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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에어컨 죄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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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온 국민이 집단 죄의식에 빠지는 시기가 돌아왔다. 바로 지금, 에어컨 켜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무더운 한여름 말이다. 폭염에다 전기료 요금폭탄으로 고통받았던 지난해 여름 누군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용기 내서 에어컨을 틀었는데, 경찰이 들이닥칠 것 같은 이 죄의식은 뭐지”라고 쓴 걸 보고 마치 내 얘기인 것 같아 혼자 피식 웃은 적이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내년 여름엔 죄의식 없이 에어컨 좀 틀어보자”고도 했다.

정부가 2016년 12월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6단계에서 3단계로 줄여 요금 단가 차이를 11.7배에서 3배로 축소하면서 요금폭탄 이슈는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머릿속 깊숙이 뿌리박힌 이놈의 ‘에어컨 죄의식’은 올해도 사라질 줄 모르고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비싼 전기 펑펑 쓰는 게 웬말이냐”는 교육을 받아온 데다 좌우 정권 불문 모든 정부가 에어컨 트는 걸 죄악시하다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다. 심지어 올해는 청와대 회의에서 (시원한) 한산모시 입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옷 한 벌 만드는 데 들어가는 한산모시 한 필 가격이 무려 70만원에 이르는데도 에어컨 트는 것보다는 더 나은 모양이다.

하지만 인정하자. 사계절이 있어 다들 착각하는 모양인데 한국은 부채나 선풍기로 버티기엔 정말 더운 나라다. 그리고 점점 더 더워지고 있다. 올 들어 경주의 한낮 기온은 39.7도까지 올랐고, 서울의 열대야는 기록적 더위라던 2016년보다 열흘이나 빠른 7월 11일 벌써 찾아왔다. 오죽하면 한국에 부임한 모 중동 외교관이 “(서울이) 더 덥다”(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페이스북 인용)고 했을까. 이 외교관이 더 덥다고 느낀 건 높은 건물 안 온도 탓이다. 28도 아래로 에어컨 온도를 맞출 수 없는 공공건물은 물론이요 상점까지 눈치 보며 에어컨을 틀어야 하니 말이다.

정부는 지난 14일 한국수력원자력의 날치기 이사회로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중단을 결정하면서 2년 전 예측보다 무려 10% 줄어든 2030년 전력 수요 수치를 내놓았다. 누구라도 싼값에 에어컨 쓸 수 있는 수요를 상정하는 대신 혹시라도 온 국민이 한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사는 걸 상정한 예상치일까봐 덜컥 겁이 난다. 설마, 아니겠지.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