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비밀 침해"vs"정당한 법집행"…‘전화 위치추적’ 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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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서는 OOOO호 사건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요청을 집행하였으므로, 이를 통지합니다.’

경찰서로부터 이런 내용의 우편물이 날아왔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통신비밀보호법 위헌소송 공개변론 #"당사자 모르게 개인정보 수집 위헌" #"대체할 수사기법 없고 제한적 사용" #사후통지 위해 추가 정보 유출 지적도

휴대전화 기지국을 통한 수사기관의 사용자 정보 수집과 실시간 위치추적은 합법적으로 이뤄져 왔다. 법적 근거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있다. 이 법은 수사상 필요한 경우 수사기관이 통신사에 기지국의 휴대전화 위치정보 추적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1년 12월 민주당 대표 예비경선 금품살포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659명의 기지국 착·발신 전화번호 자료를 수집한 뒤 당사자들에게 보낸 사후 통지서. [중앙포토]

2011년 12월 민주당 대표 예비경선 금품살포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659명의 기지국 착·발신 전화번호 자료를 수집한 뒤 당사자들에게 보낸 사후 통지서. [중앙포토]

문제는 수사기관이 확보하는 자료의 대상과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당사자가 모르게 활용된다는 점이다. 당사자에게 미리 동의를 얻지 않고, 사후 통지 강제 규정도 없어 위와 같은 우편물 사후 통지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13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헌법소원심판 공개변론에서 이른바 '기지국 수사'의 적법성 논쟁이 벌어졌다. 김모씨 등 41명은 2012년 '기지국 수사'가 헌법에 보장된 통신 및 사생활의 자유와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이날 열린 공개변론에선 청구인 측과 법무부 측 대리인, 양측의 요청을 받은 법학자들이 나와 위헌 여부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헌재 공개변론이다.

청구인 측 대리인 한가람 변호사는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철도노조 파업 때에는 수사기관의 수사를 받던 조합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배우자, 미성년 자녀까지 위치추적을 당한 사례가 있다”며 “대상과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 없이 수사기관의 자의에 의해 통신자료 요청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구인 측 공동대리인 이유정 변호사도 “자신의 행적을 국가가 몰래 들여다보길 원하는 개인은 없을 것”이라며 “사전에 불복하거나 사후에 권리구제를 받을 방법도 없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기지국 수사의 근거 조항인 통신비밀보호법 제13조 제1항 위헌확인 공개변론에 김이수 헌재소장 권한대행(가운데) 등 재판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기지국 수사의 근거 조항인 통신비밀보호법 제13조 제1항 위헌확인 공개변론에 김이수 헌재소장 권한대행(가운데) 등 재판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반면 법무부 대리인인 정부법무공단서영규 변호사는 “기지국 수사를 통해 수집한 전화번호만으로는 구체적인 개인을 식별할 수 없다”며 “실시간 위치추적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이를 대체할 수사기법이 없다”고 반론을 펼쳤다.

헌법재판관들은 사후 통지를 하기 위해 더 구체적인 개인정보가 유출된다는 제도의 모순을 지적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은 “기지국 자료를 요청하면 전화번호만 나오지만 사후통지를 하려면 다시 가입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본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서 변호사는 “사후통지를 하려면 (가입자 정보가 포함된) 통신자료를 또 요청해야 하는데 법률가로서 저도 재판관과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고 수긍했다.

“수사가 장기화할 경우 개인에게 통지가 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안 재판관의 물음에 서 변호사는 “그런 상황은 다소 불합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재판관 지적에 법무부 대리인도 "법률가로서 불합리 의문"

이번 사건은 2011년 민주통합당 당대표 예비경선 과정에서 금품살포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이 경선장 근처의 기지국 이용자 659명의 착발신 전화번호 등 통신자료를 확인하면서 불거졌다. 경선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사 기자 김모씨가 이듬해 3월 검찰로부터 통신사실 자료를 확인했다는 사후 통지서를 받고서 헌법소원을 냈다.

또 다른 청구인 중 한 명인 송경동 시인은 2011년 한진중공업 파업을 지지하는 ‘희망버스’ 기획 혐의로 기소되면서 자신이 휴대전화 실시간 위치추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경찰은 두 달 가까이 송씨의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휴대전화 실시간 위치 추적은 영장에 준하는 허가요건이 필요한데도 당사자에게 사전 고지 없이 형식적인 법원의 허가만으로 실행돼 영장주의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재는 이날 공개변론의 내용을 토대로 재판관 평의를 거쳐 위헌 여부를 판단할 방침이다. 국회에도 전해철·이재정 의원 등이 대표 발의한 법률 개정안들이 올라와 있는 상태다. 개정안은 수사기관이 통신자료를 요청할 경우 통신사업자가 그 사실을 이용자에게 통보하도록 하는 등 수사권 남용을 제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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