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졸음 부른 주 62시간 운전 … “사업자에 징벌적 배상 적용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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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가야 배차 간격을 겨우 맞추고 요기를 좀 할 수 있어요.” 10일 낮에 올라탄 M5532번 버스(오산교통)는 제한속도를 넘나들었다. 운전기사 김모(64)씨는 “차가 제한속도를 넘는 것 같다”는 지적에 그렇게 대답했다. 오후 4시쯤 경기도 오산시의 이 버스 차고지 식당 풍경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여러 명의 기사들이 이날의 첫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사 과로로 사망 사고 내더라도 #버스회사는 보험료만 뛸 뿐 #휴식규정 안 지켜도 벌금 몇백만원 #사고 뒤 대책, 또 사고 … 반복 말아야

오산교통은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사고를 낸 버스기사 김모(51)씨의 회사다. 그곳에서 김씨의 6월 근무표를 봤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형태로 일한 그는 근무일에 오산시와 서울 사당동을 하루 5회 또는 6회 왕복했다. 2시간30분이 걸리는 구간이다. 김씨는 한 달 동안 267시간30분 동안 일했다. 주당 노동시간이 약 62시간이다. 회사 측은 김씨가 사고를 낸 것은 과로에 의한 졸음운전이 아니라 전방 주시 태만이라고 주장한다. 회사 관계자는 “2시간 근무, 15분 휴식을 보장했다. 임금도 최저 시급보다 230원 많은 6700원을 기준으로 지급했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상 연장 근로를 포함한 노동시간은 주당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하지만 운수업 종사자들은 예외다. 특례 규정에 따라 운수업은 노사의 합의만 있으면 무제한 근무가 가능하다. 해외는 어떨까.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버스 기사의 하루 최대 근무시간은 일본과 유럽은 9시간, 미국은 10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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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도 버스회사의 손해는 크지 않다. 일본이나 유럽은 인명 사고 발생 시 보험료가 크게 뛰지만 한국은 공제조합이 정한 범위(할증률 250%) 내에서만 보험료가 오른다. 휴식 시간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회사는 벌금 몇 백만원을 내면 그만이다.

버스회사는 공제조합을 통해 보상을 하면 그 뒤에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 교통안전법은 사고 발생 시 국토교통부 권한으로 사고업체에 대한 특별 진단을 하고 책임 문제를 따지도록 한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은 3~4명에 불과하다. 진단이 형식적 수준에 머물기 쉽다.

전문가들은 서울시처럼 준공영제를 도입해 기사들의 과로를 방지하거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국민의 생명·신체에 대한 손해를 발생시키는 불법행위는 재발 방지를 위해 실제 손해액 기준의 배상이 아니라 이를 초과하는 배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사고를 낸 김씨는 멀쩡히 달리던 승용차를 들이받아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신모(58)씨 부부의 생명을 앗아갔다. 법적·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운전기사만 탓하면 대형 버스 사고의 반복을 막을 수 없다. 김씨는 이틀간 30시간 가까이 운전하고 하루를 쉬었다. 과로를 피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유럽·미국에서처럼 김씨의 하루 최대 근로시간이 10시간 이내였다면, 일본에서처럼 사내 안전관리자가 기사들의 바이오리듬을 체크해 운행 가능 여부를 판단했다면 참사의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피해자 부부의 가족 중 한 사람은 장례식장에서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꼭 찾아야 한다”고 애절하게 말했다. 사고가 나고, 정부가 급하게 대책을 내놓고, 대책이 별 효과를 내지 못하고, 큰 사고가 다시 나고…. 이 후진적 비극의 쳇바퀴에서 이제 벗어날 때도 됐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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