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연기로 보이스피싱범 유인해 경찰에 넘긴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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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들어선 할머니가 귓속말로 보이스피싱범과 통화 중인 사실을 제보하고 있다. 오른쪽은 우편함에서 돈을 찾으려는 보이스피싱 용의자. [영도경찰서=연합뉴스]

경찰서에 들어선 할머니가 귓속말로 보이스피싱범과 통화 중인 사실을 제보하고 있다. 오른쪽은 우편함에서 돈을 찾으려는 보이스피싱 용의자. [영도경찰서=연합뉴스]

집으로 걸려온 낯선 전화. 68세의 이모 할머니는 자신을 "금융감독원 직원"이라 소개한 상대방이 의심스러웠다.

자칭 금융감독원 직원의 말솜씨는 뛰어났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주민등록번호가 도용돼 신용카드로 500만원이 부정 사용됐다"며 "추가 피해를 막으려면 통장에서 돈을 모두 찾아 안전하게 냉장고에 보관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씨는 평소 보이스피싱 피해 뉴스를 자주 접했고, 상대의 발음이 어눌하다는 점에서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용의자와 계속 통화 중이던 이 씨는 상대방이 "한시가 급하다. 빨리 은행으로 가라"고 독촉한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버스에서 중도에 내려 곧바로 파출소로 향했다.

파출소로 들어서면서 손가락으로 '쉿' 모양을 하는 할머니. [영도경찰서=연합뉴스]

파출소로 들어서면서 손가락으로 '쉿' 모양을 하는 할머니. [영도경찰서=연합뉴스]

이씨는 파출소로 들어가 잠시 전화기를 입에서 떼고 경찰관에게 귓속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관들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이씨와 함께 은행으로 갔다.

이씨는 은행에서 2만원만 찾은 뒤 용의자에게 1100만원을 찾았다고 속였고 "5만원 권의 일련번호를 알려달라"는 용의자의 기습 질문에 지갑에 있던 5만원권 지폐를 꺼내 태연히 읽어줬다.

이후 이씨는 경찰관들과 함께 귀가,용의자가 시키는 대로 냉장고에 돈을 넣고 용의자가 시키는 대로 우편함에 열쇠를 넣어두고 집을 나섰다. 경찰은 잠복해 있었다.

10분쯤 뒤 중국 교포 윤모(41) 씨가 이 씨의 집 우편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 안으로 들어갔고 안에서 잠복 중이던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이씨는 윤 씨가 검거됐다는 말을 듣고서 보이스피싱 용의자와의 전화를 끊었다. 1시간 가까이 집요하게 통화를 이어가며 이씨를 속였다고 생각한 보이스피싱범은 그렇게 경찰의 손에 넘어갔다.

28일 부산 영도경찰서는 60대 할머니의 기지로 보이스피싱범을 검거한 소식을 알리면서 "할머니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서 "할머니의 용기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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