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서 필요하다는 기술 개발했는데 이제 필요없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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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독립을 해내니 이젠 회사를 접으라는 말이네요.”

원전산업 생태계 '탈원전'으로 뒤숭숭 #700개 업체, 종사자 9만여명 #원자력 공급체인망 구축 40년 #"국민 합의, 장기 에너지 로드맵 필요"

1993년부터 원자력 발전 계측 제어시스템을 개발해 온 우리기술 서상민 전무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 업체는 2001년 이후에는 발전소에 필요한 MMIS(Man-Machine Interface System·계측제어시스템)에 매달려왔다.

이는 원전의 '뇌 신경망'에 해당하는 기술로 원자로ㆍ증기설비ㆍ펌프ㆍ밸브 같은 원전의 크고 작은 기기를 운전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정부는 그간 MMIS와 함께 원자로 냉각재펌프(RCP), 발전소 핵심설계 코드 등 3대 기술을 국산화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연구를 독려해 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작동과 안전이 중요한 원자력 발전설비의 제어시스템은 일반 플랜트의 제어 기술과는 개념이 다르다. 이전까지 한국에 세워진 원자력 발전소에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MMIS가 거의 독점 공급해왔다. 세계 시장도 웨스팅하우스와 프랑스의 아레바가 독점하고 있다.

정부 의지가 확고했던 만큼, 우리 기술에 대한 기대도 컸다. 2010년 개발 완료 후 시범 구동을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해외 유명 업체가 수십년 동안 확보한 기술을 단기간 안에 개발해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하지만 우리기술은 더 이상 좋아할 수가 없게 됐다. 납품을 고대해 온 신고리 5· 6호기의 운명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건설이 중단되면 직원 140명(연구원 60명)의 이 업체도 방향을 바꿔야 한다.

 서 전무는 “현재 관리 물량만을 보고 한 투자가 아니라 실망이 크다”고 말했다. 2022~2023년 완공을 목표로 아직 건설이 시작되지 않은 신한울 3· 4호기는 모두 원점에서 재검토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우리기술의 기술 가치도 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탈원전’에 가속이 붙으면서 우리기술처럼 원자력 산업 생태계에 속한 기업들은 뒤숭숭하다. 원자력 발전 산업에선 핵심 설비인 원자로와 터빈 발전기 등 외에도 수만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이를 한 기업이 해결할 수 없어 원자력 발전 40년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급 체인이 형성된 것이다. 현재는 700여개 기업, 약 9만여명이 이 공급 체인 안에서 일한다는 것이 원자력 업계의 설명이다. 이중 80% 이상은 중견·중소기업체다.

2007년 한국전기연구원의 과제를 맡으며 발전 산업에 첫발을 들인 이투에스도 그 중 하나다. 이투에스는 지난해 신고리 5·6호의 원자력 제어봉을 구동하는 장치를 수주받았다. 설계를 마치고 현재 시제품을 시험하는 단계인데 원전 재검토 얘기가 나온 것이다.

 이투에스의 윤주형 대표는 “그간 에너지기본 계획 등 정부 정책을 믿고 투자를 진행해왔다”며 “진입장벽이 높고 까다로운 원자력 산업에 들어오기 위해 10년 간 노력한 시간이 아깝다”고 말했다. 연간 매출액 40억~50억원 사이를 오가는 이 회사에 딸린 직원은 30명(연구원 10명) 정도다. 만약 건설이 중단이 결정되면 여러 유형의 손해가 불가피하다.

한국 원자력학회 황주호 학회장은 “현재의 원자력 산업경쟁력 확보와 조성에 그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며 “탈원전 결정에 앞서 충분한 국민적 합의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원자력 발전 공급망에 속한 업체를 원전 해체 사업으로 전환하자는 제안도 있지만 쉽지는 않다. 업(業)의 성격이 다른데다 원전 해체 사업은 중소기업이 입지를 다지기 어려운 분야라는 설명이다.

 향후 20~30년간 세계에선 약 300기의 노후 원자력 발전소가 해체될 예정이지만 소규모 업체가 확보하기 어려운 기술과 자본력이 필요하다. 앞서 원자력 발전소 해체 경험이 있는 프랑스에서도 아레바 등 종합 원자력 회사가 해체를 진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업종을 신재생에너지로 방향을 바꾸라는 일부 환경단체의 주장에 업체들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야 말로 중소기업을 위한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의 한 관계자는 “풍력 태양광 장치에 원자력에 적용하던 기술을 쓰라는 하는데, 가능하지도 않고 설령 지금 시작한다 해도 경쟁력이 없다”고 말했다.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의 핵심인 에너지 저장장치(ESS)에 사용되는 리튬이온 배터리 등은 이미 LG화학과 삼성SDI 등 국내 대기업이 강자다. 이외에 관련 기술도 독일 등 유럽 업체들이 이미 선점했다.
 세종대 환경에너지융합학과 전의찬 교수는 “파리기후협약에서 약속한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는 신고리, 신한울 원전 가동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포함해 여러 산업적, 사회적 사안들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특히 “국민의 수용 여부나 토론 없이 에너지 로드맵을 정했다가 다음 정부에서 방침이 다시 바뀌면 또 진통을 겪게 된다"며 "에너지 정책은 20~30년 이상의 장기적 시각에서 조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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