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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힘들다고요? 너무 뻔한 소설은 싫어서 … ”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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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강원도 원주에서 병원 약사 일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는 김희선씨.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펴낸 그의 첫 장편 『무한의 책』은 신에 대한 궁금증에 ‘1980년 광주’ 같은 현실 인식을 버무린 작품이다. [조문규 기자]

강원도 원주에서 병원 약사 일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는 김희선씨.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펴낸 그의 첫 장편『무한의 책』은 신에 대한 궁금증에 ‘1980년 광주’ 같은 현실 인식을 버무린 작품이다. [조문규 기자]

당신과 내가 숨 쉬고 행동하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 혹은 하나의 견고한 기억에 의지해 일관된 행동 패턴을 시연하는 나라는 존재.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자명한 것인지, 그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내러티브는 숱하게 많다. ‘매트릭스’나 ‘트루먼 쇼’ 같은 영화도 이런 범주에 든다. 세상에 대한 실감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그렇게 확고한 게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심의 산물이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김희선(45)씨의『무한의 책』(현대문학)을 단순히 그런 상상력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하면 많은 걸 놓치게 된다. 그만큼 풍부하고 독특한 작품이어서다.

첫 장편『무한의 책』낸 작가 김희선 #SF·힙합뮤비 즐겨보는 현직 약사 #‘매트릭스’ 뺨치는 독특한 상상력 #“약 조제하듯 글도 엄밀하게 쓰죠”

소설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다는 지배적인 유일신교의 독트린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이 까마득한 과거 중생대쯤 지구의 주인이었던 티라노사우루스의 형상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신은, 불경스럽지만, 개체 수가 하나인 것도 아니다. 지구 상의 전체 인구수만큼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편재(遍在), 언제 누구의 곁에나 임한다. 인류 최후의 날을 연상시키는 신의 강림일은 2015년 12월 21일. 친절하게도 그 사실을 3년 전 예고하는데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다. 만화 같은 상상력이다. 이런 이야기 씨앗을 김씨는 200자 원고지 2200쪽, 종이책 500쪽 분량으로 뻥튀기했다. 5월 광주, 패권국가 미국의 테러 의심국 결딴내기, 인간의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위한 공장식 돼지 도축 등 현실 고발 서사에 웬만한 실험소설 뺨치는 다양한 글쓰기 형식을 녹여서다.

김씨는 자신의 소설 만큼이나 이력이 유별나다.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강원대 약대를 졸업한 그는 현재 원주의 한 병원 약사다. 동네 약국을 차린 적도 있다. 하지만 지난 21일 인터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소문난 문학소녀였다”고 했다. “독일소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좋아해『지와 사랑』『유리알 유희』같은 작품을 20~30번씩 읽었다.”

이과로의 방향 전환은 순전히 고1 때 본 영화 ‘로보캅’ 때문이다. 결국 약대에 진학했지만, 처음에는 기계공학을 전공해 로봇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언제부턴가 SF에 탐닉했고,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다. 요즘도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힙합 뮤비 등을 챙겨본다. 가령 “JTBC 예능 ‘아는 형님’이나 ‘한끼줍쇼’를 즐겨 본다”고 했다. 영화 ‘컨택트’로 만들어진 테드 창의 원작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프렌차이즈 영화 007 시리즈의 흔적 같은 것들이 이번 작품 안에 뚜렷한 건 그런 문화 편력의 결과다. 그러니 김씨의 첫 장편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SF와 대중문화를 사랑한 똑똑한 이과 출신의 개성적인 소설.

완독하면 좋은 장편에서 느끼게 되는 뿌듯함이 밀려오지만 사실 거기까지 가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제목이 비치는 것처럼 이야기가 끝없이 순환한다는 느낌이 드는데다 서사의 전체 규모가 제법 방대해서다.

김씨도 그런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읽기 힘든 독자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에 “너무 뻔한 소설이나 영화를 싫어하다 보니 이렇게 쓰게 된다”고 했다. 완결된 이야기 구조에 거부감을 느끼냐고 묻자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열린 서사구조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한국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취향에 맞지 않아서다. “굳이 꼽으라면 인간에 대한 긍정이 느껴지는 춘천 출신 김유정(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폐병으로 죽기 전 김유정에게 약을 지어주고 싶다고 했다)의 작품, 현대 작품으로는 스페인 작가 에두아르도 멘도사의 『경이로운 도시』, 페루의 노벨상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약 조제 경험은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약학은 엄밀함이 생명이다. 소설도 그렇게 쓴다. 마감일을 넘겨본 적도 없다.”

궁금하면 도전해보시길. 이 책의 무한회로에 갇힐지도 모른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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