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할 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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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사죄요구를 수용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위해선 다행스러운 사태발전이다. 그러나 盧대통령의 사과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대통령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 사과를 뜻하는 '유감'을 직접 표명한 행위의 부적절성이다. 북한은 서해교전에서 북한 해군이 감행한 기습포격에 대해서도 남북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 명의의 유감을 표시했을 뿐이다. 그에 반해 이번에 북한이 문제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화 소각사건은 우리 시민단체 일부의 행위에 불과하다.

대통령도 말했듯이 우리 정부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왜 나서서 사과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유사 사태가 발생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북한의 대회 참석을 유도하고 6자회담의 분위기를 좋게 조성하기 위해 고심에 찬 결단을 내렸더라도 통일부 장관선의 유감표명으로도 충분한 사안이었다.

또 이번 결정과정에서 정부가 보인 혼선은 너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盧대통령은 그제 관계부처 대책회의의 대북 유감표명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통일부 장관이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어제 다시 지시했다는 것이 청와대 측 설명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통일부와 외교부 등 관련부처가 대통령의 어제 지시에 왜 난감해했는지가 수수께끼다.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지시를 거역할 수 있는 체제인가. 정말 대책회의가 있었는가. 이런 결정이 남북간 극비채널 막후조정의 결과라면 그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남남갈등 조장전략은 일대 성공을 거두었다.대통령의 유감표명을 놓고 좌우세력의 찬반이 당장 격화하고 있다. 盧대통령이 보수파를 때리고 친북세력을 북돋우는 북한전략에 힘을 실어준 결과가 됐다. 아무리 남북관계의 순항을 염두에 두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북한의 사과요구 전술은 기가 막히게 적중해 그들의 뜻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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