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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과 판사의 줄다리기 … 국민 눈엔 농성처럼 보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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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설민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 부장판사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부 내 소통 체계 문제 등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설민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 부장판사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부 내 소통 체계 문제 등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지난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라는 이름의 판사 회의가 열렸다. 100명의 법관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법원행정처의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 방해 의혹 사건에 대한 추가 조사,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양승태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 관련된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의 업무 배제 및 문책을 요구한다는 결의사항이 나왔다.

법관회의 대표 사퇴 설민수 판사 #문제 바로잡을 기회였던 법관회의 #의결만 급한 느낌, 눈물까지 나더라 #권력집중 없애자는 본래 취지 훼손 #법관회의 10명 내외 운영이 효율적

이날 회의가 사법행정 전반에 대한 개선책보다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책임 문제에 집중된 데 대해 판사 사회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회의에 참석한 법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참석자 중 약 40명이 속한, 판사회의 개최를 주장해 온 법원 내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측의 입장도 듣기 위해 핵심 관계자 5명에게도 인터뷰를 제의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지난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급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한 설민수(48·연수원 25기) 부장판사가 대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설 부장판사는 회의를 마친 뒤 동료 부장판사들에게 사퇴의 뜻을 e메일로 보냈고, 21일 법원 내부통신망(코트넷)에도 글을 올렸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는 관여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사퇴 이튿날인 지난 20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설 부장판사는 이번 사태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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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는 각급 법원 판사회의에서 뽑은 판사 100명이 모였다. [조문규 기자]

19일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는 각급 법원 판사회의에서 뽑은 판사 100명이 모였다. [조문규 기자]

대표를 사퇴한 이유는.
“그날 회의 진행 과정을 보고 의욕을 잃었다. 어차피 19일까지 위임받은 것이어서 사퇴했다. 법관회의가 사법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좋은 기회였는데, 이를 날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사법부의 문제점은 뭔가.
“민주적 소통체계가 없다. 대법원장의 하명이나 지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조가 굳어져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대법원장과 행정처의 주도로 추진하다 좌절된 상고 법원 문제의 경우 판사들은 그게 우리의 숙원사업이고 역점 과제라는 내용을 게시판과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접했다. 이번 국제인권법연구회 사태도 이런 문제의 연장선이다.”
회의 진행 방식에 문제가 있었나.
“판사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발제를 담당한 40여 명의 대표판사가 이미 구성한 안을 통째로 올리는 등 의결에 급한 느낌이었다. 다수의 판사가 찬성하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잠도 안 오고 눈물까지 나더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 부장판사 인 그는 법원 내에서 ‘튀는 판사’로 통한다. 2007년 ‘화이트칼라 범죄의 양형’이란 제목의 글에서 “(법원이) 수천억원을 횡령한 재벌 회장은 도주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김 한 장을 훔친 노숙자는 얼마든지 도주한다고 생각한다”는 ‘유전무죄론’을 펴기도 했다. 자신을 ‘철저한 현실론자’라고 자평한 그는 법관회의에서의 의결에 대해 “급격한 변화 요구는 비현실적·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비효율적인 이유는.
“임기 말인 양승태 대법원장이 새 정책을 펼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면 오히려 대법원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대법원과 판사들의 줄다리기가 계속되면 국민 눈에는 농성하는 것처럼 비칠 우려도 있다.”
판사들의 갑론을박에 대한 생각은.
“회의 속기록 공개가 미뤄지다 보니 의결안에 찬성·반대하는 판사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마치 국제인권법연구회와 행정처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듯한 지금이 너무 싫다. 우리는 모두 판사일 뿐이다.”

설 부장판사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에 대해서도 “이번처럼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모이는 것보다 10명 내외를 선출해 소규모로 운영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와 같은 다른 형식의 중앙기관은 ‘권력 집중’을 없애자는 본래 취지에 반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현행 제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의기구를 만들어 행정처에서 논의한 사안을 사후적으로 심의·의결하는 방식으로 견제할 수 있다. 또 사법정책에 대해 판사회의가 안건을 상정할 권한이 주어지면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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