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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취향] 할머니가 담근 고추장 하나면, 세계인도 내 친구

중앙일보

입력

2001년 등단한 시인 김이듬(49)이 속된말로 ‘한 건’을 했다. 2016년 미국에서 번역·출간된 그의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Cheer up Femme Fatale)』이 2017년 미국 번역문학 에이전트 쓰리퍼센트가 주관하는 ‘최우수 번역 도서상’ 최종후보(10권)에 오른 것이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미국 대표 번역문학 온라인 잡지 ‘워드 위드아웃 보더스’는 김 시인을 두고 “자신만만하고 어떠한 제약도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김 시인 작품에 대한 이런 이방인들의 평가는 어쩌면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할 때도 유효할지 모른다. 한국 시를 찾아주는 곳이면 어디든 향한다는 그에게 국경이라는 제약은 무의미해 보이니 말이다. 최근 슬로베니아 여행기『디어 슬로베니아』를 낸 김 시인에게 여행의 취향을 물었다.

동유럽 소국 슬로베니아의 수도 루블라냐. 김 이듬 시인은 지난해 슬로베이나에서 보낸 92일 간의 기록을 '디어 슬로베니아'라는 책으로 담아냈다. [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동유럽 소국 슬로베니아의 수도 루블라냐. 김 이듬 시인은 지난해 슬로베이나에서 보낸 92일 간의 기록을 '디어 슬로베니아'라는 책으로 담아냈다. [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2017년 미국 최우수 번역 도서상 최종후보에 오른 김이듬 시인. [중앙포토]

2017년 미국 최우수 번역 도서상 최종후보에 오른 김이듬 시인. [중앙포토]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머무는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한국에서 절반, 외국에서 절반을 보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보면 '유럽으로 떠날지 말지 고민할 때 머릿속에서 벌이 윙윙댔다'는 일화가 나온다. 하루키는 벌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유럽으로 떠났다. 나도 마음에 두근대는 소리가 울리면 일단 여행짐을 꾸린다.

현지 친구를 사귀고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시인 김이듬 #미운 이에게 절대 안 알려주고픈 여행지는 슬로베니아

주로 어떤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나.  

한국 시를 찾아주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2012년에는 베를린자유대학에 파견작가로 참여하면서 여행을 했다. 2014년에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시페스티벌(Stockholm International Poetry Festival) 초청 작가로 참석했다. 2016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시카고·뉴올리언스 등 10여 개 도시에서 낭독회를 했다. 일을 하러 가도 한번 가면 그 여행지에서 최소 한 달은 머문다.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살거나 부엌이 딸린 집을 숙소로 빌려 생활한다.
나는 문학창작과를 전공하지 못한(※김 시인 학부 전공은 독어독문학이다) 대학 강사로 문학계에서도 비주류다. 그래서 슬프냐고? 천만에. 만약 지금 내가 대학 정교수였다면, 그리고 주류 사회에 편입됐다면 꿈꾸지 못했을 시간적 여유가 있다. 여기에 방랑벽이 더해져 자유롭게 떠난다.

가장 인상적인 여행지가 어딘가.  

2016년 늦가을과 겨울, 그리고 2017년 늦봄을 보낸 슬로베니아가 기억에 남는다. 4개월 정도 슬로베니아에 산 셈이다. 슬로베니아 루블라냐대학교 한국학과에 초빙돼 대학생들과 한국문학에 대해 세미나를 했다.

눈 덮인 줄리안 알프스 자락과 사진 왼쪽의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블레드 성. [중앙포토]

눈 덮인 줄리안 알프스 자락과 사진 왼쪽의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블레드 성. [중앙포토]

슬로베니아 남쪽 해안 중세도시 피란.[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슬로베니아 남쪽 해안 중세도시 피란.[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슬로베니아는 미운 사람에게 절대로 알려주고 싶지 않은 여행지다. 슬로베니아 안에 모든 유럽이 있다. 북서부에는 알프스 설산이 있고, 서남부는 지중해를 맞대고 있다. 전라도 만한 나라 곳곳에 중세 도시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름난 와이너리와 온천도 많다. 물가는 체감하기로는 파리의 절반 수준이다. 그리고 음식이 정말 맛있다. 슬로베니아는 빵·우유·치즈 등 주식에 방부제를 넣지 못하게 법으로 막아 놨다. 거의 모든 식재료가 유기농이다.
루블라냐에서는 눈 감고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현지인처럼 살았다. 서울로 치차면 남산 정도 될까? 매일 아침 티볼리 공원을 산책했다. 오후에는 서울시청 앞 광장 격인 프레셰렌 광장 주변의 노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금요일에는 류블라냐 중앙시장을 찾았다. 과일을 사고 갓 만든 길거리 음식도 사먹었다.

루블라냐의 프레셰렌 광장. [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루블라냐의 프레셰렌 광장. [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식재료와 길거리 음식을 파는 루블라냐 중앙시장. [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식재료와 길거리 음식을 파는 루블라냐 중앙시장. [사진 슬로베니아관광청]

여행갈 때 꼭 가져가는 게 있나.  

할머니가 직접 담근 고추장. 다른 고추장은 절대 이 맛이 안 난다. 이민 가방에 한국 식재료도 가득 넣어간다. 현지에서 사귄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을 해주기 위해서다. 미역국도 끓이고 떡볶이도 만든다. 일단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 친구가 된다. 2015년 파리에서 석 달 머물렀을 때 한국음식으로 24명의 파리지앵을 사귀었다. 시인·사진가·도서관 사서·피아니스트 등 제각각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엮어 『모든 국적의 친구』라는 책을 쓰기도 썼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친구를 만드는 것. 어디서든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김이듬 시인의 여행법이다. [사진 김이듬]

음식을 나눠 먹으며 친구를 만드는 것. 어디서든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김이듬 시인의 여행법이다. [사진 김이듬]

루블라냐대학교 한국학과 학생들과 김이듬 시인. [사진 김이듬]

루블라냐대학교 한국학과 학생들과 김이듬 시인. [사진 김이듬]

친구를 통하면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경험을 쌓기 쉽다. 슬로베니아 여행 때도 그랬다. 겨울에 몸이 안 좋았는데, 친구의 추천으로 루블라냐 사우나에 갔다. 말 그대로 ‘누드비치’가 아니라 ‘누드 사우나’였다. 온탕도 사우나도 수건 하나 걸치지 않는 남녀공용 사우나 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현지 친구의 추천으로 루블라냐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 노점이 가득 들어서는데 조금씩 맛이 다른 와인을 판다.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서 주머니에 달랑달랑 넣고, 한 잔에 2유로쯤 하는 와인을 20잔쯤 사 마셨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여행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적극적으로 헤매보는 것, 그게 여행의 묘미 같다.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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